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 |
우리는 주목사회에 살고 있다. 주목사회는 남들의 주목이 최대의 관심사가 된 사회형태다. 주목이 관건인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인정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인정받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이 내 존재를 알아야만 한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으면 그냥 투명인간일 뿐이다. 학생들이 노페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학교 밖 세상에서 학생은 단지 입시기계일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인정을 구할 곳은 또래집단의 세계뿐이다. 여기서 노페는 중요한 ‘인정 화폐’다. 나도 ‘입을 수 있는 인간’이야. 나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 난 투명인간이 아니라고.
현대사회는 또한 정체성이 어려운 과제가 된 사회다.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과거에는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먼 과거에는 ‘나는 상놈이야’(신분)로 해결됐다. 가까운 과거에는 ‘나는 교수야’(직업)라거나 ‘나는 현대맨이야’(직장)라는 것이 정체성의 많은 문제를 답해주었다. 말하자면 신분이나 직업, 직장이 내가 누구이며 누구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신분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직업과 직장은 수시로 바뀐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체성의 단단한 ‘말뚝’을 상실했다. 과잠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정체성의 말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사회는 지극히 파편화됐다. 학교나 학과 활동은 스펙 경쟁으로 소멸됐다. 대학생들은 아무런 소속감도 없이 그냥 떠다닐 뿐이다. 나를 붙잡아 맬 말뚝이 필요해, 나도 어딘 가에 속해 있다는 표지가 필요하다고.
노페나 과잠은 분명 문제다. 상품의 착용 여부로 인간과 투명인간이 구별된다니. 과잠으로 학벌을 과시하다니. 개탄만 하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바는 노페와 과잠의 또 다른 쓰임새다. 주목과 인정 화폐, 그리고 정체성의 말뚝.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가 바라는 뭔가로 대체할 수 없다면 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