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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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네 산책] 미국서 다시 읽히는 ‘분노의 포도’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좀 살만한 집 아이들은 ‘우산’이 그려진 양말을 신고 다녔다. 우선이 그려진 양말을 갖기 위해 백화점 물건을 훔쳐 나오다 들켜 통로에 꿇어앉아 두 손들고 바짝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내 마음속 어린 시절은 금방 암전이 되고 만다. 그래도 그 끔찍한 기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 나오면 우산이 그려진 그런 물건 따윈 얼마든지 가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예컨대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실재하리란 믿음을 동아줄처럼 붙잡았다.

이런 ‘보통 한국인’의 꿈이 뿌리내리던 삶의 터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IMF 시절이었다. ‘은행이 망할 줄 몰랐다’는 어머니의 탄식이 상징하듯, 많은 사람들이 은행돈 얻어 마련한 집을 고금리로 날려버리게 되었을 때 누군가는 여유 있게 집 사냥을 다닌다는 소문을 퍼졌던 시절, 읽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퍽 충격적인 소설이었다. 은행과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는 유례없는 대공황의 그늘이 드리워진 1930년대의 미국이 무대였다. 여기에 3년간의 자연재해까지 겹치자 이자를 갚지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난민이 되어 이주의 길(오클라호마에서 서쪽 끝 캘리포니아까지)을 나선다는 것이 소설의 시작이다. 특히 다음 구절이 잊혀지지 않았다.

“경이(驚異)가 사라지면 땅과 일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정함도 사라진다”.

그 뒤로 또 몇십 년 뒤 “미국도 망할 수 있구나” 하는 소문이 실감 났던 2011년부터 미국에서 다시 ‘분노의 포도’가 읽힌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분노가 포도처럼 영글어가던 시대를 잊은, 오래 지속되던 ‘미국의 아침’에 대한 낙관이 무너지자 미국인들은 자신의 삶을 근원적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은행 파산, 금융 스캔들, 주택거품 등을 겪은 뒤로 어떤 집단 무의식이 요트와 완벽한 골프를 즐기던 삶을 역겨운 것으로 바꿔놓은 것 같다.(나오미 울프)” 필자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나누어 갖고 모두가 그 영혼의 일부인지도 모른다”는 소설 속 감동적 구절을 찾아내어 다시 밑줄을 긋는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서로의 상처 입은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이 영혼의 구제금융일 터이다.

강경미 꾸리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