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부터 올 연초까지 진행된 대기업 총수일가에 대한 인사가 비교적 ‘잔잔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겉으로는 ‘공격적 경영’을 외치면서도 속내는 경제 불확실성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새해에는 총선과 대선이 있고, 양극화 등을 대기업 탓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 승진인사를 내기에는 적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비교적 중량감이 있는 총수일가의 승진내용을 보면 회사의 미래가 엿보인다. 총수 입장에서는 종종 실패를 하더라도 ‘실패학’을 경험해 경영수업에 도움이 되는 차원에서 일가를 전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해가 바뀌면서 치열한 시장경쟁이 예상되는 분야에 힘을 실어주는 차원에서 ‘계급장’을 높여주는 배려적 인사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용병술’이 압도적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임진년 인사도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가 섞여 있는 가운데 30대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특히 대부분 쟁쟁한 대학의 경영학석사(MBA) 출신들이란 점에서 단순한 경영승계가 아닌 전문성까지 담보한 승계라는 명분을 얻고 있다.
최근 승진한 15명의 총수직계 인사 중 2·30대 비중이 53%대에 이른다. 20대 김동관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을 비롯해 30대에는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 4세대인 허윤홍 GS건설 상무보, 박준경·철완 금호석유화학 상무보,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 등이 그들이다.
40대는 허기호 한일시멘트 그룹 부회장, LS전선 구자은 사장,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 조현상 효성그룹 부사장 등이 승진했다. 50대는 구본걸 LG패션 회장, 허진수 GS칼텍스 부회장이 승진해 중량급 인사로 무게감을 더했다.

태양광 구원투수 김동관 실장
이번 총수 일가 인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사는 막내격인 김동관(29)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 실장은 한화그룹 기획실에서 경영수업을 받다가 한화솔라원 기획실을 담당하게 됐다.
오비이락인지 몰라도 김 실장 인사 이후 한화솔라원은 한달 동안 나스닥시장에서 주가가 62.83%나 뛰었다. 태양광 구원투수로 아들을 등판시킨 진정성과 승부가 시장을 움직인 것으로 분석된다.
유럽 경제불황으로 태양광 소재산업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친자’를 전쟁터 선봉으로 내세운 김승연 회장의 용단이 빛났다는 평가다. 한편으로는 혹독한 경영수업을 시킬 수 있는 오지로 내보낸 용병술의 일환이란 평가도 덧붙여진다.
한화솔라원은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인 태양광 사업을 담당하는 기업이다. 김 실장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지난 2010년부터 그룹 기획시 차장으로 경영수업을 받아 오다가 이번 인사로 자리를 옮겼다.
재계 3세 ‘패션’ 전쟁 예고
LG패션에서 잔뼈가 굵은 구본걸 씨가 드디어 대표이사 회장으로 오르면서 정점을 찍었다. LG패션은 삼성 이건희 회장 딸 이서현 씨가 부사장으로 있는 제일모직과 시장에서 전통적인 경쟁관계에 있다.
여기에 현대백화점의 정지선 회장(정교선 부회장의 형)이 연초 패션사업 진출을 선언함으로써 올 재계는 3세들간 패션전쟁이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구 회장은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손자고 이 부사장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손녀, 정 회장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로 모두 창업주의 3세들이다.
패션업계에서 제일모직과 LG패션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시장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백화점 그룹은 계열사인 현대홈쇼핑을 통해 의류업체인 ㈜한섬의 지분 34.6%를 4200억원에 인수, 경영권을 확보하고 패션사업에 본격 진출함으로써 3각 구도로 재편될 전망이다.
정교선 부회장이 현대백화점 기획조정본부 부사장을 거쳐 현대홈쇼핑사장 겸 그룹 기획조정본부 사장을 역임해 온 이력으로 봐서 ‘정교선의 싸움’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이번 승진인사에 대한 타당성이 설명된다.
정 부회장이 경청호 부회장과 함께 형 정지선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동시에 경영능력을 착실히 쌓아 계열분리까지 가지 않겠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편 대표이사 회장에 오른 구 회장이 가장 부담스러운 위치다. 그래서인지 구 회장의 올 목표가 남다르다. 구 회장은 자체 브랜드 육성과 품질향상을 통한 브랜드력 강화를 강조하면서 올해 2000억짜리 브랜드 10개를 목표로 세웠다.
또 지난 2009년부터 이자벨 마랑, 질스튜어트, 바네사브루노, 질 바이 질, 헌터, 막스마라 등 수입브랜드의 국내영업권을 인수하는 등 이 분야 사업도 확대 중이다.
“나는 ‘MBA’다”
이번 총수 일가 인사 15명 중 10명(67%)이 경영학석사(MBA) 출신이다. 보스턴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한국타이어 조현범 사장, 무역학과를 나온 현대백화점 정교선 부회장까지 합하면 대부분 ‘경영’에 대한 이론적 선행학습은 돼 있는 상황이다.
또 MBA 전원이 외국, 특히 미국 대학원에서 학위를 따온 것으로 나타나 글로벌 경영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온 LG패션 구본걸 회장은 미 펜실베니아대에서 MBA를 받았다. 올해 59세인 GS칼텍스 허진수 부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온 후 미 조지워싱턴대에서 MBA를 받는 등 일찍이 ‘선진의 길’을 걸었다.
이 밖에 한일시멘트 그룹 허기호 부회장 선더버드대, LS전선 구자은 사장 시카고대, 금호타이어 박세창 부사장 메사추세츠공대, 금호석화 박철완 상무보 하버드대, 동양그룹 현승담 상무보 스탠퍼드대, LS니꼬동제련 구본혁 이사가 UCLA대에서 MBA를 받았다. GS건설 허윤홍 상무보와 동부제철 김남호 부장은 워싱턴대 MBA 동문이다.
“고무(타이어) 타는 냄새 심할 듯”
이번 인사를 두고 재계 한 임원은 “고무(타이어) 타는 냄새가 심해질 것 같다”고 언급했다. 다름 아니라 한국타이어 조현범 사장과 금호타이어 박세창 부사장의 동반 승진을 두고 한 말이다.
조현범 사장은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차남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셋째 사위다. 대통령 사위라는 후광 때문에 사업적으로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가 정권이 바뀔 무렵 사장으로 올라선 것은 제대로 사업을 벌려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동안 광고홍보팀장, 마케팅부본부장, 경영기획본부장(부사장)으로 일했던 그로서는 경영능력을 한껏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만큼 타이어 업계의 경쟁도 과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통적인 라이벌사인 금호타이어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장남인 박세창 부사장을 대항마로 내세웠다. 대립각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인사다.
"이氏가 만들고 현氏가 키운다"
동양그룹은 현재현 회장의 장남인 현승담 동양시멘트 부장을 상무보로 승진시켰다. 미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2007년 동양메이저 차장으로 입사한 현 상무보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난해 8월부터 동양시멘트에서 근무 중이다.
현 상부모는 창업주의 가장 큰 외손자이면서 현 회장의 외아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동양그룹을 승계할 것이 확실시 된다. 따라서 이번 인사는 본격적인 경영수업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이씨가 만든 동양그룹을 현씨가 얼마나 성장시킬지 재계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현 상무보의 어깨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분석이다.
“4촌끼리도 경쟁해야”
금호석화는 사촌 동갑내기 박철완·준경 씨를 상무보로 승진시켰다. 박철완 상무보는 고 박정구 금호그룹 회장 장남으로 금호석화 지분 9.98%를 보유하고 있다.
박준경 상무보는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의 장남으로 금호석화 지분을 7.17%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4촌간 치열한 경영성과 경쟁이 예고되고 있다. 물론 박찬구 회장의 지분을 증여 또는 상속 받으면 박준경 상무보의 지분율이 높지만 표면적으로는 박철완 상무보가 지분이 많은 상태.
앞으로 금호석유화학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계열분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4촌간 경영권을 놓고 다툴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경영성과 측면에서는 동갑내기 4촌에 같이 승진했기 때문에 비교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내부경쟁이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한국타이어 조현범 사장의 사촌 형인 효성그룹 조현상 전무도 이번 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해 ‘사촌승진’ 2호를 기록했다.
세대 앞서가는 다손(多孫) 구씨·허씨 일가
구인회·허만정은 LG의 전신인 락희화학의 공동창업주다. 경남 진양의 천석꾼집 허씨 일가가 자금을 대고 이웃집 구씨 일가가 경영을 맡아 오늘의 LG그룹을 세웠다. 전형적인 다손(多孫) 집안인 구씨, 허씨 일가는 LS, GS 등으로 분가를 하면서 가세와 사세를 동시에 확장시켰다.
이번 인사에도 구씨, 허씨 일가 중 5명이 승진을 했다. 제일 맏형 격인 2세대 LS전선 구자은 사장을 비롯해 3세대 GS칼텍스 허진수 부회장, LG패션 구본걸 회장, GS건설 허윤홍 상무보, LS니꼬동제련 구본혁 이사 등이 포함돼 ‘가문의 힘’을 보여줬다.
이들 중 허윤홍 상무는 4세대로 구씨, 허씨 일가의 광범위하고 앞서가는 ‘세대의 힘’까지 보여주고 있다. 허세홍 GS칼텍스 전무, 허서홍 GS 홈쇼핑 근무 등 GS그룹이 LG, LS보다 4세대 경영승계가 앞서가고 있다.
한편 아직 몇몇 그룹에서 인사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변수가 많은 해란 점에서 어느 때 보다 ‘조심스럽게’ 인사가 날 전망이다.
유성호 기자(재계 탐사보도 전문매거진 에콘브레인 편집장 / shy1967@gmail.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