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님! 이 다리를 빼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트라우너는 성모 마리아에게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가 통해서일까. 트라우너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다리를 움직이자 기적같이 쑥 빠지는 것이었다.
사단법인 파티마의 세계사도직인 푸른군대 한국본부장인 하 몬시뇰은 1948년 12월까지 3년8개월에 걸친 소련군 포로 시절 서너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이때의 극한적 경험이 후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국행을 결심하고, 한국에 와서도 성공적인 신부 생활을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그는 회상했다.
1922년 10월 14일 독일 베르팅겐에서 지방법원 서기인 아버지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 무녀독남으로 태어난 그는 신부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저버린 채 신학공부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41년 고교 졸업 직후 독일 공군 통신병으로 입대한 그는 유고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자신이 속한 부대 군단장이 “무기를 버리면 독일로 돌아가는 퇴로를 열어주겠다”는 소련군 군단장에게 속아 소총과 탱크 등 모든 무기를 넘겨줬다가 독일군 4만여 명이 한꺼번에 포로가 된 것이다.
그와 동료 독일 군인들은 8일 동안 먹지도 못한 채 도보행진을 하는 등 참혹한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독·러 포로교환을 통해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크게 각성해 어머니의 뜻에 따라 1949년 3월 딜링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신장염에 걸려 학업을 중단한 채 알프스 산으로 휴양을 떠났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직업학교에서 신학교사로 3년여 동안 일했다. 그러다가 “신학공부를 3년 더 하면 신부를 시켜주겠다”는 시바스 신부의 제안에 따라 신학대학에 복학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8년 4월27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5월 1일 첫 미사 집전에서 “하나님과 성모마리아의 도움과 여러분의 기도로 저는 신부가 됐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그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쟁 직후의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시바스 신부가 보여준 슬라이드 영상기 강론의 영향이 컸다. 광복 직후인 1946년부터 2년간 북한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시바스 신부의 강론은 큰 울림을 주었다.
하 몬시뇰은 1958년 5월 22일 독일 북부 블라타마루항에서 일본행 화물선에 몸을 싣고 7주만인 7월 5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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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안토니오 몬시뇰이 1961년 11월 부산 남구 동항성당 부근에서 한 고아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
이듬해인 1959년 10월 5일 그는 신부가 없던 부산 남구 우암동 동항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해 본격적인 한국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빈민구제 사업부터 했다.
“당시 우암동 일대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피란민이 살았는데 모두 너무 가난했어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미군 원조품인 옥수수와 밀가루, 독일에서 보내온 옷가지 등 구호품을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했지요”
파티마의 세계사도직 관계자는 “우암동 일대 판자촌에 살았던 5만여명의 피란민 가운데 몬시뇰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며 “독일에서도 몬시뇰님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수많은 옷과 식량을 보내왔고, 밀가루 등 미군의 각종 구호품도 성당으로 배달돼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식량을 배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 몬시뇰은 이때 길거리를 배회하던 상체소아마비 여자아이(10)와 시각장애 소년(9) 등 소년소녀 7명을 사제관으로 데려와 한방에서 자며 직접 키웠다.
부모를 여의고 6살에 입소한 배경준(61·사단법인 파티마의 세계사도직 사무국장)씨는 경남정보대를 졸업하고 광진목재에서 36년간 근무하다 2006년 전무이사로 정년 퇴직한 뒤 현재 하 몬시뇰을 곁에서 돕고 있다.
하 몬시뇰은 1960년대 초반 독일 어느 공장에서 보내온 재봉틀 10대를 밑천으로 무료 학원을 차려 주부들에게 봉제교육을 했다. 그러던 중 교육의 중요성을 느낀 그는 독일로 가 전국을 돌며 한국의 참담한 상황을 전하며 각계각층의 지원을 이끌어내 1965년 3월 성당 뒤편 여유 부지에 한독여자실업학교(현 부산문화여고)를 설립했다.
학생들이 몰려왔다. 전교생이 200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커지자 이 학교는 1970년대 중반 해운대구 우동으로 이전했다. 이 학교는 이후 독일에서 온 청년 자원봉사자인 칼로 슈비케(2005년 타계)씨와 한국인 정순택(68·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씨가 운영을 맡으면서 더욱 발전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한독실업학교 졸업생 중 매년 100여명이 독일에 간호사로 취업해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종잣돈이 된 천금같은 외화를 송금했다.
하 몬시뇰은 또 독일에 있던 어머니 가로리나(1971년 7월 타계) 여사가 1963년 전 재산을 팔아 보내준 3억여원으로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대형 교육관(사랑의 집·현재 마리아피정센터로 개칭)을 건립했다. 가로리나 여사는 재산을 처분한 뒤 시립양로원에 들어갔다.
동항성당 교우들은 여사가 별세한 후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마리아피정센터 현관에 ‘외아들 하 안토니오 신부님을 한국 땅에 보내시고, 전 재산을 바쳐 사랑의 집을 건립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는 요지의 글을 여사의 얼굴과 함께 동판에 새겨 부착했다.
하 몬시뇰은 1977년 교회조산원을 설립해 1993년 문을 닫을 때까지 2만6000여명의 신생아 출산을 도왔다. 그는 교회일치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79년 2월 연임 제한으로 20년 동안 시무한 동항성당 주임신부직을 사임한 뒤 성심수녀회와 파티마의 세계사도직인 푸른군대 한국본부장 업무에 전념하고 있다.
미국에서 한 천주교 신부가 과거 소련을 회개시키기 위해 창설한 푸른군대의 한국본부장인 그는 신을 부정하는 전 세계 공산세력을 회개시키기 위해 남다른 열정을 쏟아왔다.
매년 5월 임진각을 찾아 북한 주민의 구원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있다. 매년 10월 천주교 전국 성당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기도회를 여는 것도 하 몬시뇰의 기도회에서 비롯됐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3월 협성문화재단으로부터 제1회 협성봉사상 대상과 상금 2000만원을 받았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4절까지 어눌한 목소리로 불러 한국을 절절이 사랑하는 속내를 내비쳐 분위기를 숙연케 했다.
부산시는 명예부산시민증을 수여해 한국인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하 묜시뇰은 “얼마 남지 않은 제 여생의 마지막 계획은 북한을 회개시키는 것인데, 그 첫 작업으로 임진각에 파티마 성모 순례성당을 지을 것”이라며 “이미 임진각 인근에 부지 1000평을 구입했으며 수련원을 겸한 성당을 신축해 북한에 하나님과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전하는 전초기지로 삼겠다”며 활짝 웃었다.
부산=전상후 기자 sanghu60@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