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봄, 눈’으로 24년 만에 스크린 나들이
배우 윤석화가 말하는 연기와 인생
“신인배우 윤석화입니다.”
지난 37년간 대한민국 연극계를 대표해온 배우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무려 24년 만에 찍은 영화 ‘봄, 눈’(감독 김태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였다.
1987년 장길수 감독의 ‘레테의 연가’ 이후 주로 무대를 통해 관객과 소통해온 그가 오랜만에 외도를 감행했다. ‘봄, 눈’은 말기암 판정을 받고 가족들과 이별을 준비하는 평범한 엄마 순옥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윤석화는 그동안 영화계로부터 적지 않은 러브콜을 받았지만, 이 영화만큼 운명적으로 다가온 작품은 없었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한 한옥카페에서 배우 윤석화를 만났다. 은발의 숏커트, 왜소한 체구였지만 한국 연극계의 산 증인다운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 봄에도 눈이 내릴까요
암 선고를 받고 삶을 정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반복돼왔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봄, 눈’ 역시 진부하고 통속적일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눈물이 아름다워’였다고 한다.
“아마 ‘눈물이 아름다워’란 제목이 아니었다면 시나리오를 읽어보지도 않고 정중히 거절했을 겁니다. 전 ‘눈물의 힘’을 믿는 사람인데, 그런 점에서 김태균 감독의 정서가 깊이 와 닿았죠. 그리고 시나리오 맨 첫 장에 ‘새벽 첫 차를 타고 일터에 나가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 바칩니다’라는 글을 읽고, 나 또한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따뜻한 위로가 느껴졌어요.”
눈물은 만 개의 단어보다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힘이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세상을 가장 먼저 깨우는 새벽과도 같은 존재다. 윤석화는 이 두 가지에 이끌려 24년 만의 스크린 나들이를 결심했고, ‘세상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을 영화를 통해 위로해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봄, 눈’이란 제목은 윤석화 본인이 직접 감독에게 제안했다. 봄에 기적처럼 내리는 눈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란 존재는 그런 기적을 잉태하는 위대한 존재에 다름 아니다.
완연한 봄인 4월이 됐음에도 매서운 바람에 눈까지 내리는 요즘 날씨를 보며 남들과는 다른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김태균 감독이 ‘선생님 밖에 눈이 내려요. 눈물이 다 나오네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라고요. ‘응? 4월에 눈이 내린다고?’ 우리 영화를 축복해주는 것 같아 기뻤죠. 아무리 평범한 삶이라 해도 사랑과 긍정의 마음으로 살았다면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신인으로 돌아온 베테랑 여배우
“선생님을 잘 모르는 요즘 10대, 20대 관객들에게 본인을 직접 소개해보라고 하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기자의 당돌한 질문에 대뜸 “신인배우 윤석화입니다”라고 답한다. 신인배우? 누가 감히 연극계 ‘대모’에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에 윤석화는 “허허~”하고 웃어 보이더니 “그럼 신구 선생님의 표현처럼 ‘니들이 윤석화를 알아?’라고 말해볼까요”라고 농을 친다.
두 번째 작품이니 영화계로 따지면 ‘신인’이란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혹시라도 이 작품으로 영화제에서 상을 받게 된다면 여우주연상이 아닌, 신인여우상이었으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25년 만에 작품 하나 해서 주연상을 받는다는 건 지금까지 영화계를 위해 일해 온 분들에게 예의가 아니겠죠. 그런데 신인상은 좀 욕심이 나요. 왜? 나이 든 사람은 신인상 받으면 안 되는 건가요?(웃음)”
뭐든 재미있는 걸 좋아한다는 그는 무거운 질문이든, 가벼운 질문이든 재치 있게 맞받아치는 여유로움도 보여줬다. 주변에서는 배우 윤석화에 대해 ‘공주나 여왕 행세를 할 것’이라고 오해도 하지만, 본인은 “나는 철저히 무수리과(科)다. 너무 솔직해서 미련해보일 때도 있지만 그 모습도 나니까 별 후회는 없다”며 평소 성격에 대해 털어놨다.
◆ 뼛속까지 연극쟁이
스스로를 ‘연극쟁이’이라고 칭하는 윤석화. 영화 개봉 후에는 곧바로 무대로 돌아가 다시 에너지를 불태울 생각이다. 영국 연극의 본고장 웨스트엔드(런던 서부)에서 활동하는 최초의 아시안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기도 하다.
배우가 아닌, 제작자와 연출자로도 활동 중인 그는 “연극을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며 그 이유를 밝혔다. 연극을 37년간이나 해왔고 그만큼 사랑하기에 무대는 절대 떠날 수가 없다.
“예전에 후배 최정원씨가 내게 묻더군요. 예쁘고 젊은 후배들이 점점 치고 올라오면 불안한 마음은 안 드시냐고. 그때 제가 답했죠. ‘난 너희들보다 그릇이 크기 때문에 괜찮아’라고요. 물론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후배들이 진정 나보다 빛나는 배우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커요. 그래서 한 편이라도 더 만들어 후배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죠.”
몇 해 전, 대한민국 사회를 강타한 학력위조 파문 때문에 한동안 무대에 서는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평생 자유를 꿈꿨지만, 결국엔 스스로 채운 족쇄로 인해 자유롭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그를 끝까지 지탱해준 건 종교적 믿음, 그리고 ‘윤석화다워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아무리 근사한 명예의 옷을 걸치고 있어도 다른 사람이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누더기를 걸치고 길거리 장사를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죠. ‘윤석화답다 ’ ‘배우답다’ ‘아내답다’ ‘엄마답다’ 등 ‘~답다’라는 본분만 잘 지킨다면 제대로 된 삶 아닐까요.”
영화배우로서 호기롭게 다시 대중 앞에 선 윤석화. 향후 2년 정도는 연극에 매진한 뒤, 기회가 된다면 스크린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오는 9일 서울에서 열리는 ‘봄, 눈’ 언론시사회를 마친 뒤 자녀들이 있는 영국 런던으로 돌아가, 그곳에서의 일 또한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올해 ‘라이온 킹’ ‘에비타’ 등을 작업한 거물급 작사가 팀 라이스와 손을 잡고 할리우드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뮤지컬로 옮길 예정이며, 배우로서 웨스트엔드 무대에 오를 야심찬 계획도 준비 중이다.
오랜만에 대중 곁으로 돌아온 배우 윤석화, 그의 무대를 지켜보며 설렜던 팬의 입장에서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한윤종 기자 hyj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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