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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의 중국 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⑬ 漢中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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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族… 漢語… 漢字… 중국과 관련된 단어들의 고향
중국 사람들은 중국어를 한어(漢語)라고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어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를 가진 중국에서, 다시 말해 제국인 중국에서 한족이라는 한 민족이 사용하는 말에 지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한족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중국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어(漢語)라는 말뿐만이 아니라, 한자(漢字), 한문(漢文), 한족(漢族), 한인(漢人) 등 중국과 관련된 수많은 단어에는 ‘한(漢)’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데 그 기원은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에 있다. 한나라로 말미암아 중국을 가리키는 여러 명칭에 ‘한’이란 글자가 들어가게 되었으며, ‘한’이란 말은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과 쑨원(孫文)의 중화민국이 내세운 멸청흥한(滅淸興漢)이란 구호에서 보듯 민족주의적 색채까지 띠게 된 것이다.

친링산맥은 산시성 남부에 있는 산맥으로 전체 길이는 1500km이다. 중국 남북의 자연의 경계가 된다. 최고봉은 타이바이산(太白山)이다.
그런데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한중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한나라는 한중 지역에서 시작하여 한중 지역에서 그 생명을 다한 까닭이다. 유방이 한중 지역을 기반으로 천하를 통일하여 한 제국을 세운 것이 한나라의 시작이라면,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가 죽은 후 한중(漢中) 지역에 주둔하면서 한 제국의 부활을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죽은 것은 사실상 한나라의 마지막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라는 한중 지역에서 시작하여 한중 지역에서 끝났다. 이러한 한중 지역에 대해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호기심을 가지게 만든 것은 장기판이었고, 그 호기심을 언젠가는 반드시 가보고 말겠다는 욕망으로 발전시킨 것은 ‘삼국지’였다.

유년 시절에 내가 가장 몰두한 놀이는 장기(將棋)였다. 장난감 하나 없던 유년 시절에 장기놀이만큼 재미있는 놀이는 달리 없었고, 이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항우(項羽)와 유방이란 이름을 알게 되었다. 또 이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항우는 이(蝨)를 잡기 위해 바위로 내리쳤고, 조조는 손톱으로 눌렀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항우가 융통성 없이 힘이 센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할아버지로부터 항우가 힘은 산을 뽑을 정도이고 기상은 세상을 뒤덮을 정도(力拔山氣蓋世)였다는 말을 듣고는 유방이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는지를 궁금해 하게 되었다.

한중으로 가는 시한고속도로(西漢高速公路)는 답답하고 지루했다. 시안에서 한중까지의 길은 258km로 그리 멀다고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 답답했다. 그것은 중국 사람들이 쑤이다오(隧道)라고 표기하는 터널 때문이었다. 내가 탄 승용차가 김만중이 ‘구운몽’에서 800리 진천(秦川) 땅이라고 부른 관중평원을 벗어나 친링산맥(秦嶺山脈)으로 접어들면서부터 끝없는 터널의 연속이었다.

남과 북의 풍토와 기후를 구분짓는 경계선으로 삼을 정도로, 또 옛날 사람들이 한중으로 가는 길에 대해 ‘촉도난(蜀道難)’이란 말을 사용할 정도로 친링산맥은 험준하고 웅장한 산맥이었다. 이 산맥 속에서 잠시 햇빛을 보았는가 하면 곧 다시 터널의 어둠 속으로 접어들곤 하는 길을 2∼3시간이나 견디는 데에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가끔 10km가 넘는 터널 속에서 교통량이 많아 30분 정도씩 터널 속에 머무를 때는 고함이라도 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푸콰이(普快)’라는 느리게 달리는 열차로 친링산맥을 넘으며 도대체 이 산길 언제 끝날 것인지 조바심쳤던 일은 터널로 통과하는 답답함에 비하면 약과였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2007년에 개통된 시한고속도로에는 총 136개의 터널이 있었다. 258km의 거리에 136개의 터널이 있다고 하면 터널도로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터널 하나의 길이가 1km라 가정해도 절반이 넘는 136km가 터널인데 내 느낌으로는 절반이 훨씬 넘는 거리가 터널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관중평원과 한중분지를 제외한 친링산맥 부분은 거의 대부분이 터널로 이루어졌다고 단정해도 틀렸다고 할 수 없는 도로였다.

이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터널 여행을 계속하면서 나는 ‘삼국지’에 나오는 ‘계륵(鷄肋)’이란 말이 바로 내 처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터널 여행을 계속하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조조가 “한중을 빼앗기면 중원이 진동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 난감해 하던 상태가 바로 터널 속의 내 심리상태였다. 

한중시 남쪽에 위치한 배장단. 한고조 유방이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는 의식을 치른 장소이다.
10월 말의 한중 지역은 아직도 여름의 잔영이 남은 듯 햇살이 따가웠다.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유방이 한신(韓信)을 대장군에 임명하는 의식을 거행한 배장단(拜將壇)이 있는 고한대(古漢臺)였다. 기원전 206년 4월 항우는 내심 관중 지역의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던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해 친링산맥 너머로 쫓아 보냈고, 이에 대해 심각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유방은 다음해 5월 몰래 진창도(陳倉道)를 통해 관중 지역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배장단은 유방의 천하통일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출발점이었다. 여기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회음후(淮陰侯) 열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유방은 “왕께서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려 한다면 반드시 좋은 날을 골라 재계(齋戒)하시고 단장(壇場)을 설치하여 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소하(蕭何)의 진언에 따라 배장단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모든 신하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자신이 먹을 밥을 돌리고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줌으로써 신임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시골 출신의 날건달이었던 유방은 대귀족 가문 출신인 항우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지명도에서도, 경제력에서도, 교양에서도, 군사력에서도 유방은 항우와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항우보다 결정적으로 나은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을 쓸 줄 아는 능력이었다. 천하를 통일한 후 유방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장량(張良)처럼 뛰어난 지모를 가진 것도, 소하처럼 탁월한 행정력을 지닌 것도, 한신처럼 군사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능력을 소유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이들을 적절히 기용할 줄 안다. 반면에 항우는 범증(範增) 한 사람조차도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딩쥔산 아래에 있는 제갈량의 무덤 무휴묘의 정문. 234년 오장원 군중에서 사망한 후 안장되었다.
한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제갈량의 무덤인 무후묘(武侯墓)이다. 제갈량은 위나라를 치기 위해 한신이 그랬듯이 진창 지역으로 진격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한중 지역으로 모셔져 무후묘에 묻혔다. 나는 제갈량의 명성과 국민적 사랑에 비해 소박해 보이는 무후묘를 천천히 둘러본 후 묘의 뒤쪽에 있는, 야트막한 딩쥔산(定軍山)을 올랐다. 그러면서 유년기에 나를 사로잡았고, 그 감동에 대한 기억이 기어이 나를 한중 지역까지 오게 만든 그 ‘출사표(出師表)’를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았다.

제갈량의 ‘출사표’에서 그 시절 나를 가장 감동적으로 사로잡았던 부분은 “신은 본래 베옷 입은 사람으로 남양에 묻혀 밭이나 갈며 난세에 목숨이나 부지하기를 바랐을 뿐 제후에게 알려져 쓰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황송하게도 몸을 굽혀 세 번이나 신의 초막을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신은 감격하여 개나 말처럼 달리기로 했던 것입니다.”(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라는 대목이었다.

제갈량 무덤 앞의 묘비는 명·청 시기에 세운 것이다.
이 구절이 나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시골 촌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찮은 시골 촌놈으로 제갈량과 나를 동일시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소년 상태였던 나는 남양에 묻혀 베옷을 입고 밭을 갈던 시골 사람이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며 뜻을 펴나가는 영웅적 모습에 매료당했음에 틀림없다.

나는 딩쥔산의 정상에 올라 북쪽의 친링산맥을 바라보며 제갈량 역시 이곳에 올라 친링산맥을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의 야산에서 제갈량을 생각하며 소년다운 유치함으로 불안하게 미래를 생각하던 나와는 달리 촉한의 명운을 짊어진 그는 친링산맥을 바라보며 총명하고 냉정한 머리로 강대한 위나라와의 힘에 부치는 싸움을 여러 차례 분석하고 또 분석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천문지리를 살피며 가장 유리한 때를 고르고 골라 마침내 저 산맥을 넘어 오장원으로 갔을 것이다. 

산시성 한중시 몐(勉)현 남쪽 5km에 위치한 당쥔산. 삼국시기 유명한 전쟁터였다.
제갈량 집안의 형제들은 모두가 보통사람 이상으로 출중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었다. 맏형인 제갈근(諸葛瑾)은 일찍 오나라의 손권(孫權)에게 몸을 의탁하여 후에 대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또 같은 집안의 동생벌인 제갈탄(諸葛誕)은 위나라로 가서 상당한 지위의 벼슬을 했다. 이렇게 일족이 흩어져서 각기 다른 나라를 섬긴 것은 난세가 사람을 그렇게 만든 점도 있고, 사람이 난세에 적응한 점도 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촉은 용을 얻었고, 오는 호랑이를 얻었고, 위는 개를 얻었다”고 평했다. 이처럼 제갈량의 능력은 다른 형제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비범한 능력으로도 기울어가는 촉한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제갈량 또한 한 개인의 능력으로 기울어가는 국가의 운명을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이 될 군사행동을 시작하며 올린 ‘후출사표(後出師表)’는 그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 “모든 일이 이와 같아서 미리 헤아리기란 어렵고 다만 신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할 것이며 죽은 후에 그만둘 것입니다”(凡事如是難可逆見 臣鞠躬盡力死而後已)라고 썼던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사적인 욕망의 틈입을 한치도 허용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라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생애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장엄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