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을 떠난 지 3시간. 실핏줄 같은 형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싯누런 물결의 황허(黃河)와 이국적 풍광의 사막, 그리고 한족·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중국 닝샤후이족(寧夏回族)자치구의 중심도시 인촨(銀川)의 외곽 도로망이다.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접한 이 지역 사람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못 각별하다. 국내선만 오가던 인촨 공항에 한국의 진에어 전세기가 지난 3월 이후 주 2회 취항하면서 분위기가 그렇게 됐다. 전세기는 신형도, 대형도 아니지만 이 지역에는 매우 특별한 항공편이다. 유일무이한 국제선인 까닭이다.
지난주에 우연찮게 둘러본 인촨 공항은 좀 과장하자면 시골 역사 대합실이나 진배없었다. 안내판은 중국 간체자(簡體字) 일색. 하지만 예외가 존재했다. 한글 안내판이었다. ‘탑승수속’, ‘안전출구’, ‘화장실’과 같은 뻔한 내용이지만 영어 알파벳도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한글을 대하는 경험까지 뻔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중 양국이 24일로 수교 20주년을 맞는다. 거대 담론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점이다. 짚어볼 것이 그만큼 많다. 특히 경협 발전상은 괄목할 만하다. 1992년 수교 당시 64억달러였던 교역액은 지난해 2200억달러를 웃돌 만큼 커졌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도 한국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다. 중국의 3대 교역국인, 긴요한 경제 파트너인 것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가 따로 없다.
수교 당시 중국을 이끌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무해유익(無害有益)”이라고 했다. 리펑(李鵬) 총리는 “수도거성(水到渠成·물이 흐르면 개천이 될 것)”이라고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수교 이후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낙관적 전망은 이미 현실이 됐다.
잔칫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안보, 외교 등의 측면에선 애물단지가 수두룩하다. 한·중 양국의 이해가 상충하는 북한 문제가 대표적이다. 베이징대의 진징이(金景一) 교수 같은 이는 양국 관계의 걸림돌인 북한에는 지경학(地經學)적 접근만이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먹고사는 문제만 다루면서 천천히 상생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각도라면 어디 북한 문제만인가. 한·중 관계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경제는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한·중의 경제적 이해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양국 관계가 2008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올라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도, 국가 관계도 빵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만 밝히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편협한 측면도 없지 않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국제 관계를 굳건하게 이어가려면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인촨 공항의 한글 안내판이 그런 종류에 속한다. 상대에 대한 관심, 배려가 녹아 있는 상큼한 미소와 같다. 그런 미소가 곳곳에 번지면 때로 갈등과 마찰이 불거져도 원상복구가 한결 쉽다. 감정의 힘이다. 문화적 공감대를 넓히는 중국의 한류(韓流)와 K팝, 한국의 한풍(漢風) 등도 같은 맥락이다. 도시 자매결연 사업도 대동소이하다. 수교 20주년 이후를 밝게 내다보려면 이런 알파들에 힘을 실어야 한다. 당국의 안목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아쉽게도 인촨의 전세기 취항은 10월 말로 일단 중단된다고 한다. 인천∼인촨 직항편이 끊기면 현지인들은 차량으로 8시간, 기차로는 13시간 걸리는 시안(西安)으로 가서 국제선을 타고 인천, 서울을 찾아야 한다. 결행이 쉽지 않은 여행길이다. 역방향의 여행길도 고행길이 되고 만다. 인촨의 한글 안내판이 내년 이후에도 건재할까. 다시 못 보게 된다면 적잖게 서운할 것 같다.
논설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