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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김일성 주석 사망때 첫 조문사절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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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통일교 총재와 김일성 주석이 마치 오랜만에 만난 형제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의 사진은 문 총재와 북한의 깊은 인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91년 12월6일 ‘반공주의자’로 세상에 알려진 문 총재가 북한을 전격 방문했을 때 촬영된 것이다. 당시 문 총재는 “원수의 집이 아니라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에 갔다”고 했다.

김 주석은 이 사진 속 만남 이후 3년째 되는 해인 1994년 7월8일 유명을 달리했다.

핵을 가진 정권과는 대화할 수 없다며 북한을 거들떠보지 않던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지만 문 총재는 주위의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박보희 당시 세계일보 사장을 조문사절로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들여보내는 파격적 결단을 내렸다. 남한 인사로는 유일했다. 이후 남한에서 ‘조문파동’이 불거졌고, 박 사장은 이 일로 인해 4년 가까이 국내에 입국하지 못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이후 17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김 주석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에도 통일교의 ‘조문’ 전통은 이어졌다. 이때도 남북관계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남한에는 ‘제2의 조문논란’이 점화됐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남북 간 대치 국면 속에서도 문 총재 막내아들인 문형진 통일교 세계회장과 주동문 워싱턴타임스 회장, 박상권 평화자동차 대표이사가 12월24일 조용히 경의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김 위원장 조문을 위한 방북길이었다.

이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일행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방북 일정보다 이틀이나 앞선 것이었다.

정부는 예민한 정국과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해 통일교 관계자들이 육로를 통해 방북한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통일교와 북한의 각별한 관계를 염두에 둔 배려로 해석됐다.

당시 문 회장 일행은 “존경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영생을 기원한다”는 조화를 전달하고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 위원장을 조문한 뒤 30일 평양을 떠났다.

당시 북한 조선중앙방송도 “금수산기념궁전에 정중히 안치돼 있는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영구에 문 총재가 보내온 화환이 12월26일 진정됐다”고 보도해 관련 내용을 알렸다.

이후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인 이달 3일 문 총재는 병환으로 성화했고, 이틀 만인 5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본인 명의로 조전을 보낸 내용을 북한 매체를 통해 공개했다.

김민서 기자 spice7@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