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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재연 논설위원 |
대선 때마다 투표일을 앞두고 벌어지는 풍경이다. 유권자는 한동안 ‘블랙아웃’ 상태에 빠진다. 후보들 지지율 변화를 알 수 없어서다. 일정 기간 여론조사 결과 공표가 금지되는 탓이다. 이른바 ‘블랙박스 기간’이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선거일 6일 전부터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는 투표 마감 시간까지 공표할 수 없다. 이번 대선에서는 지난 13일 이후 조사된 결과는 발표할 수 없었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 22일 중 엿새간 국민의 눈은 깜깜해졌다. 사정이 나아진 게 그렇다. 2002년 대선 때는 공식 선거운동 시작과 함께 공표가 금지됐다. 유권자가 여론 동향을 모르는 상황이 22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12·19 대선이 끝났다. 국민 혼란은 과거보다 더했다. 박·문 후보가 막판까지 박빙 판세를 보인 탓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방송 3사의 마지막 여론조사에선 노무현 후보가 45.7%, 이회창 후보는 38.6%의 지지율을 기록해 7.1%포인트 격차가 났다. 2007년에는 이명박 45.9%, 정동영 20.6%였다. 이번 대선에서는 대부분의 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접전으로 나타났다. 박·문 후보가 0.1%포인트 격차를 보인 경우도 있었다.
여론조사 결과가 유권자의 후보 선택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게 공표 금지의 입법 취지다. 어차피 될 사람을 찍자는 ‘밴드왜건 효과’나 약세 후보를 동정하는 ‘언더독 효과’로 국민 진의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보들이 유리한 결과만 홍보해 혼탁선거를 초래할 것이란 우려도 작용했다. 선거 공정성과 유권자의 알 권리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과연 그럴까. 여론조사 결과가 유권자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전문가들 견해가 그렇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유권자들은 여론조사를 참고만 할 뿐 후보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여론 추이 같은 외부적 요인이 배제된 채 독립적·자율적으로 판단하는 게 실제로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되레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아보는 게 올바른 판단에 도움이 된다.
정보 부족은 혼란만 가중시킨다. ‘카더라 통신’이 난무하고 각 후보 측의 아전인수식 주장이 쏟아진다. 이번 대선에서도 문자메시지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체불명의 여론조사 결과가 마구 돌아다녔다. 전화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부산을 떠는 모습도 심심찮게 목격됐다. 자기도 모르는 새 범법자가 될 수도 있다. 공표 금지 조항을 어기면 2년 이하 징역이나 4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폐해가 적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여론조사 공표 제한 수위가 높은 나라는 찾기 어렵다. 공표 제한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최소화하고 있다. 세계여론조사학회(WAPOR) 조사에 따르면 66개 국가 중 미국, 일본, 영국 등 36개국은 여론조사 공표에 아무 제한이 없다. 14개국은 투표 1∼2일 전에만 규제한다. 프랑스는 2002년 관련법을 고쳐 선거 일주일 전에서 이틀 전으로 공표 금지 기간을 단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8대 국회 당시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이 공표 금지 기간을 6일 전에서 3일 전으로 단축하는 법 개정안을 발의한 적이 있지만 무산됐다.
여론조사 공표 금지 조항은 도입 당시의 선거문화와 유권자 수준을 반영한 것일 게다. 시대가 변했다. 선거 환경도 유권자 의식도 달라졌다. 뉴미디어 발달로 규제의 실익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국민의 알 권리만 침해하는 셈이다. 이런 법적 규제를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는가. 유권자의 궁금증을 풀어줄 때가 됐다.
원재연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