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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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광장] 엔저와 日전자업계의 공습

日 실지회복 위해 타도한국 연합전선
소송전 삼성·LG 적전분열할 때인가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쇼 CES 2013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통 일반인이 관람하는 개막일 하루 전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전시부스를 언론에 공개하는 것이 관례지만 어찌된 일인지 LG전자와 달리 삼성전자는 부스를 공개하지 않았다. 전시 준비가 아직 안 됐다는 이유였다.

취재진은 개막일인 8일(현지시간) 오전 9시 직전 삼성전자 부스에 들어가서야 그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라며 화면이 휘어진 55인치 ‘커브드(Curved·곡면)’ OLED TV 1대를 깜짝 공개했는데 보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각 LG전자 전시장에도 똑같이 세계 1위라며 커브드 OLED TV 3대가 전시됐다. 전날 LG전자가 언론 사전 공개 때는 내놓지 않은 제품이다.

어찌 된 내막일까. 사연은 이렇다. 애초 두 업체는 커브드 OLED TV를 이번 CES에서 공개할지를 놓고 치열한 탐색전을 벌였다고 한다. LG전자의 한 관계자는 “이제 겨우 OLED TV를 세계 최초로 출시한 상황에서 커브드 TV는 너무 앞서가는 측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양측이 눈치를 보다 ‘세계 최초’를 놓치지 않으려고 막판에 이를 전격 공개한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이번 CES에 내놓을 마땅한 혁신적인 제품이 없어 고민 끝에 기술이 설익은 제품을 내놓았다는 분석도 있다. 시청자의 눈과 화면의 거리는 중앙보다는 가장자리로 갈수록 멀어지기에 가장자리로 갈수록 화면 왜곡현상이 생기는데 커브드 디스플레이는 이를 극복하려는 기술이다. 따라서 이는 대화면에서나 필요한 기술이다. 55인치 정도의 크기에서 시청자는 가장자리 왜곡현상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동안 디스플레이 업계의 숙제를 해결한 빼어난 기술이기는 하지만 55인치에는 그다지 필요 없다는 얘기다.

삼성과 LG가 이처럼 세계 최초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일본 업체들은 한국 기업의 뒤통수를 쳤다. TV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던 일본 소니는 삼성 LG가 내놓은 OLED TV보다 화질이 4배나 뛰어난 56인치 4K(울트라HD) OLED TV를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파나소닉도 소니와 같은 제품을 내놓았고, LCD의 원조인 샤프는 이보다 한발 앞서 8K 제품을 내놓았다.

삼성과 LG는 OLED TV와 울트라HD TV를 따로따로 개발했지만 일본 기업들은 이를 하나로 합친 제품으로 한국 기업에 뺏긴 TV 왕국의 명예를 되찾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미 일본 기업들은 똘똘 뭉쳐 ‘한국 타도’에 나선 상황이다. 소니, 히타치, 도시바는 지난해 4월 일본 산업혁신기구(INCJ)의 출자 지원으로 ‘저팬디스플레이’를 설립했다. 일본 총무성도 지원 사격에 나섰다. 내년 7월에 세계 최초로 4K 방송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4K OLED TV 기술에 주력하는 자국 기업을 위해 콘텐츠를 제공해 새로운 TV 구매 수요를 창출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일본 기업들은 ‘엔저’라는 든든한 우군까지 얻었다. LG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소니, 파나소닉, 니콘, 샤프 등 일본 전자기업들은 엔화 약세에 힘입어 올해 영업이익이 수천억원씩 늘 것으로 분석됐다.

더구나 하이센스, 하이얼, TCL, 창홍, 콘카 등 중국 업체들도 이번 CES에서 울트라HD TV를 전시할 정도로 한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최현태 산업부 차장
상황이 이렇지만 우리는 집안싸움에 바쁘다. 삼성과 LG는 지난해 8월부터 OLED 특허기술을 둘러싸고 서로 특허침해금지, 특허무효, 손해배상, 제품 판매·생산 금지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소송을 내며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삼성은 또 자사 냉장고 용량이 LG 제품보다 더 크다며 비교 광고를 유튜브에 올렸고 LG전자는 급기야 최근 100억원대 소송을 내는 등 사사건건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다.

‘혁신의 아이콘’인 애플이 요즘 말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 타계 이후 애플이 특허소송에 집중하는 사이 아이폰의 혁신은 사라졌고 애플의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영원한 1등은 없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삼성과 LG도 집안싸움에 몰두하다 일본과 중국 기업들에 어렵게 확보한 ‘안방’을 다 내어주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최현태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