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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방한계선 철책선의 밤 풍경.(1997년 작) |
1997년 어느 여름날 고지에 위치한 일반전방초소(GOP) 대대장실을 찾았다. 그 지역 관측초소(OP)에서 잠을 자며 며칠 동안 사진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대장에게 인사도 할 겸 찾은 것이다. 물론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해도 그 지역의 대대장과 수색대대장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다.
안내장교와 함께 대대장실을 노크하니 입술이 터져서 피가 굳어 있는 훤칠한 키의 대대장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나는 대대장과 마주앉았다. 안내장교가 이번 사진작업에 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사진작업이 끝나는 날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대대장의 입술이 터져 피가 굳어 있는 이유가 제일 궁금했다. 대대장은 눈치를 챘는지 이곳 GOP 대대장으로 부임한 후 두 달 동안 하루도 맘 편히 잠들 수가 없다고 했다. 야간에는 매시간 철책을 돌며 혹 병사들이 졸지나 않나, 적이 침투하지 않을까를 점검하며 병사들의 안전과 사기를 북돋아 주다 보니 입술이 자꾸 터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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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등에 수많은 벌레들이 날아와 춤을 추며 황금선을 연출했다.(1997년 작) |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대대장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대대장은 나의 그런 행동에 두 눈만 껌벅거릴 뿐 당연하다는 눈치였다. 그 말 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끓여온 차를 마신 후 땅거미가 비무장지대에 내려앉자마자 대대장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는 무장한 병사와 함께 철책선으로 향했다. “비록 잠자리가 누추하지만 편안히 쉬십시오.” 그 말 한마디를 남긴 채 투박한 군화소리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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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로 올라간 남방한계선 철조망.(1997년 작) |
남방한계선 철조망에는 일제히 경계등이 켜졌다. 불 켜진 남방한계선은 하나의 황금 곡선으로 이어졌다. 신비로운 비무장지대만의 풍경이었다. 대대장실 앞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았다. 비무장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북한의 북방한계선 철조망은 깜깜했다. 철책 너머 희미한 불빛 하나가 깜박거릴 뿐이었다. 갑자기 어둠을 뚫고 북한군의 대남방송이 귀가 따갑도록 비무장지대를 넘어왔다. 곧바로 한국군의 대북방송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의 사투리 방송과 한국군의 방송이 뒤엉켜 또 다른 전쟁을 하는 듯했다. 남방한계선 철조망은 황금선, 북방한계선은 깜깜절벽, 비무장지대의 극과 극은 6·25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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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철조망에 피어난 눈꽃.(1997년 작) |
중대장 침실이 내가 묵을 방이었다. 1인용 군용침대에 굵은 널판지 한 장이 전부였다. 창문에 쳐놓은 모기장에는 수많은 곤충이 붙어서 방으로 들어오려고 아우성이다. 그중에는 고향에서 40년 전에 사라진 사슴벌레와 장수벌레도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밖으로 나가 경계등 아래 앉았다. 비무장지대는 먹칠한 것 같았으며 적막감이 감돌았다. 쇠똥구리가 날아와 팔에 붙었다. 노루가 여기저기서 울고 소쩍새 울음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쩍새 울음소리는 고향을 더욱 그립게 했다. 이 깊은 밤 두 눈을 부라리고 북쪽을 향해 장승처럼 서 있는 병사들도 부모형제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경계등에 몰려든 수많은 곤충이 신비스러운 황금 곡선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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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미 가족.(1997년 작) |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깊은 밤, 그토록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들과 새들도 잠자리를 찾아 잠들었을 텐데 입술 터진 대대장의 발걸음은 지금쯤 철책선 어디에 멈춰 있을까? 휴전선 155마일에 장승처럼 서서 북녘 땅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장병들은 누굴 위해 초조하게 밤을 지새워야 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거리다가 결국 뜬눈으로 아침을 맞게 되었다. 날이 훤해지면서 굳게 쳐진 철조망 위로 자유롭게 날아오는 두루미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차라리 북녘 땅 가고 싶은 곳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두루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사진작가·시인·‘휴전선 155마일 450일간의 일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