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일류(日流)’가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별로 큰 화제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타 연예인을 중심으로 떠들썩하게 진행되는 한류와는 달리, 일류는 보이지 않는 콘텐츠의 토대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바로 원작 시나리오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됐던 멜로드라마인 조인성·송혜교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일본의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이 그 원작이었다. 요즘 김혜수의 열혈 직장녀 변신으로 화제를 모으는 ‘직장의 신’은 일본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원작으로 한다.
과거 한국드라마로서는 이례적인 완성도를 보여줬던 ‘하얀거탑’도 일본 원작이었다. 그 전후로 ‘요조숙녀’, ‘꽃보다 남자’, ‘공부의 신’, ‘결혼 못하는 남자’, ‘그저 바라보다가’, ‘닥터진’ 등의 일본 원작 드라마가 선보였는데, 최근 들어 이런 추세가 강화되고 있다.
영화부문에서도 일본 원작이 많이 나타난다. 박찬욱 감독을 국가대표 작가로 부상시킨 ‘올드보이’를 비롯해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미녀는 괴로워’, ‘화차’, ‘용의자X’ 등이 그렇다. 앞으로 일본 원작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게 중론인데, 당장 고현정의 드라마 컴백작도 일본 원작인 ‘여왕의 교실’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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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2 월화드라마 ‘직장의 신’. |
일본 원작을 참조하는 문화는 우리에게 워낙 뿌리가 깊다. 대중음악계는 광복 직후부터 일본음악을 전폭적으로 참조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도 일본 망가, 저패니메이션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일본과 한국은 물리적으로도 가깝지만 사회문화적으로도 형제국이나 다름없다. 지난 참여정부 당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추진될 때, ‘일본식인 한국의 경제문화를 한·미 FTA를 통해 미국식으로 바꾼다’는 얘기가 나왔다.
우리를 일본식이라고 할 정도로 일본사회와 한국사회가 유사하다는 이야기다. 박정희정부의 근대화는 일본 시스템을 크게 참조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변화는 일본의 뒤를 따라 나타나는 것이 많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주기적으로 일본에 가서 차기 사업구상을 했다고 한다. 일본 관찰에서 한국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을 정도로 일본사회와 한국사회가 비슷했다는 이야기다. 일본 문화가 수입되는 창구가 부산이었기 때문에, 한때 부산이 서울문화를 선도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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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
한국에서 수많은 드라마를 찍어내다 보니 창작력 고갈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의 원천이 필요해졌는데 우리와 문화를 공유하는 일본에서 그것을 찾게 된 것이다. 일본은 다양한 만화와 소설로 인해, 이야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워낙 경쟁이 치열해지고 경기상황이 안 좋다보니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작품만을 찾는 것도 일류의 또 다른 이유다.
새로운 창작물로 도전하길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이 한류의 가장 큰 시장으로 떠오르면서 일본 마케팅의 중요성이 커진 것도 한 이유가 된다.
일본 원작은 일본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본시장에 어필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한류 기대작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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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미니시리즈 ‘꽃보다 남자’. |
창조는 도전과 실패의 결과다. 도전을 꺼리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풍토에선 창조라는 결실이 나타날 수 없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피하고, 다른 곳에서 이미 성공한 원작을 가져다 쓰는 분위기에서 어떻게 창조가 가능하단 말인가? 또, 창조는 연습의 결과이기도 하다. 하고 하고 또 하다 보면 뭔가를 만드는 힘이 생겨난다. 하지만 원작의 범람은 우리 작가들에게 창조 연습이 아닌 각색 연습만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물론 원작도 우리식으로 잘 바꿔내면 원작 이상의 창조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소녀시대’가 처음 나왔을 땐 지나치게 일본풍이라고 했지만, 결국 신한류의 주역이 됐고 이젠 아무도 소녀시대를 보며 일본을 떠올리지 않는다. 한국 아이돌문화는 일본을 넘어 세계에서 그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남의 것을 참조하려면 이 정도로 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일류에선 이런 모습이 약하다는 게 문제다. 일본드라마에는 전문직이나 평범한 소시민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많이 나타난다. 한국드라마는 그걸 화사하고, 극적이고, 악인과 멜로가 강조되는 분위기로 만들어내는 정도에 그칠 때가 많다. 원작을 가져다 익숙한 방식으로 바꾸는 도식적 구도론 창조력이 살아나기 어렵다. 우리가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한류가 오래갈 수 있을까?
하재근 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