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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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사람]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

요즘 문인들 독서·사색의 폭 얕아
세속·정치적 유혹에 휩쓸리지 말고
자기 만족에 그치는 시 써서는 안돼
고향 수원서 무료 시 창작교실 운영
5060세대 문학의 열기 아주 뜨거워
‘노년문학’에도 관심 갖
15일 스승의 날을 맞은 최동호(65) 고려대 국문과 교수의 감회는 남다르다. 8월 정년퇴임을 앞둔 그가 교단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스승의 날이라서다. 그동안 최 교수의 가르침을 받고 문단에 발을 내디딘 문인만 70여명에 이른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그에게 현대시를 배우고 국문학자의 길로 들어선 제자까지 포함하면 100명을 훌쩍 넘는다. 이들은 스승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기념문집 발행 준비로 여념이 없다.

국문과 교수 말고도 ‘시인’과 ‘문학평론가’란 직함을 더 가진 최 교수를 그가 회장으로 있는 시사랑문화인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의 협의회 사무실은 고려대 안암캠퍼스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다. 그는 “교수 연구실은 책으로 꽉 차 어쩔 수 없이 협의회 사무실을 쓰고 있다”며 웃었다. 그런데 책이 넘치기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연구와 교육, 그리고 시 창작과 평론에 35년을 꼬박 바친 노학자의 삶 전체가 오롯이 녹아있는 듯했다.

시인인 최동호 고려대 교수는 1976년부터 최근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최 교수는 “그동안 쓴 시 중에서 몇 편의 작품을 골라 6월 한 권 분량의 시선집을 내놓을 것”이라며 “여름 바닷가 백사장에 버려진 소주병에 착안해 쓴 ‘병 속의 바다’라는 시를 표제작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나는 문인일수록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시를 쓰려면 그만큼 많은 공부가 필요하죠. 남의 시도 열심히 읽어야 하고요. 공부하지 않고 재능만으로 시를 쓰는 사람은 40대쯤 되면 시가 안 써져요. 독서와 사색의 폭이 얕은 게 우리 시단의 한계입니다.”

요즘 그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교수와 시인, 평론가 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라면 뭘 택하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답은 아주 명쾌하다. 시인이다.

“사실 국문학 연구도 시를 제대로 쓰기 위해 시작한 겁니다. 처음에는 선생으로 교단에 서서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나중에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됐죠. 나한테 배운 사람들은 시 갖고서 헛소리는 안 할 거라고 자부합니다. 시인이 세속에 휩쓸리거나 정치적 유혹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밀실 안에 갇히거나 자기만족에 그치는 시도 안 돼요. 시에 있어 일시적 유행은 거품에 불과합니다. 나는 늘 정도를 가르쳤고, 시의 당당함과 자존심을 말했습니다. 그건 평생에 걸쳐 연구한 정지용(1902∼1950) 시인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죠.”

최 교수가 최근 펴낸 ‘정지용 시와 비평의 고고학’(서정시학)은 1982년부터 약 30년간 쓴 정지용에 관한 논문 15편을 묶은 책이다. 정지용은 온 국민의 애송시 ‘향수’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학문적 조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정지용 연구의 개척자나 다름없는 최 교수는 올가을 ‘정지용 전집’ 출간을 통해 그간의 성과를 집대성할 계획이다.

“1976년 가을 정지용의 시를 처음 읽고 감흥에 휩싸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지용과 나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이후 정지용의 시는 거의 평생을 동반한 논문의 주제이자 시 쓰기의 모범적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최 교수의 시 철학은 그가 만든 ‘극(極)서정시’라는 용어에 잘 녹아 있다. 극서정시란 인간의 희로애락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시 중에서도 특히 짧고 간결한 시를 뜻한다. 장황하게 나열하지 않고 단 몇 줄만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게 목표다. 시어의 밀도가 여간 높지 않고선 어려운 일이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은 짧고 간결하다는 점입니다. 시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정도로 축약해야 이 시대와 호흡할 수 있어요. 컴퓨터로 말하면 한 화면 안에 다 들어와야 한다고 할까요. 같은 단어의 반복적 나열은 무의미합니다.”

최 교수가 주간으로 있는 출판사 서정시학은 그와 뜻을 함께하는 시인들의 작품집을 ‘서정시학 서정시’와 ‘서정시학 시인선’이란 이름 아래 연속으로 펴내고 있다. 문학성을 인정받는 유명 작가들의 시집을 총망라해 국내 정상급 시인선으로 평가된다. 최 교수는 “1920년대에 쓴 산문은 오늘날 이해하기 힘들지만 같은 시대의 시는 읽을 수 있다”며 “시는 산문보다 훨씬 생명력이 길고 보편성을 지닌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요즘 고향인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시 창작 교실을 운영한다. 한 차수에 40명씩 모집해 12주 과정으로 진행한다. 강의는 매주 금요일 저녁 화성행궁 옆 수원문화재단에서 이뤄진다. 3회 이상 결석하면 수료증을 안 주고 탈락시키는 등 ‘학사관리’가 엄격하다. 수강생은 등단을 노리는 시인 지망생부터 취미로 시를 쓰려는 사람까지, 또 20대 대학생에서 7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1기 수강생 수료식이 2월1일 열렸고 지금은 2기생들이 공부하는 중이다.

“수원은 인구 100만명이 넘는 대도시이지만 시인을 많이 배출하진 못했어요. 고향 주민들이 내게 시 강의를 부탁하기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수원시 등에서 재정적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우리 힘만으로 운영하고 있죠. 요즘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꿈꾸는 5060세대 사이에 문학의 열기가 아주 뜨겁습니다. 각종 문예지에 시를 투고하는 고령자 숫자가 굉장히 늘었어요. 그동안 우리 문학이 너무 ‘단거리 문학’, ‘청년의 문학’이었다면 이제 5060세대의 ‘노년문학’에도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조명해야 합니다.”

글·사진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