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니니 지칠 만도 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모로코인의 친절에 넘어가지 말라”는 주의를 많이 들었기에 경계해야 했지만, 그럴 만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호의를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호텔 두세 군데에 데려다 줬고, 나는 그중에서 적당한 곳을 찾았다. 가격 흥정도 잘 마쳤다.
짐을 풀어놓고 그와 함께 중동의 시장 ‘수크’를 구경하러 나갔다. 그때부터 다시 그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의심부터 시작했으니 그는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그러나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로코인들이 여행객을 상대로 많은 사건을 일으켜 왔으니 조심하라”면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나의 오해였다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그와 더 이상 동행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해한다”면서 “다음에 만나면 더 좋은 친구가 되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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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 있는 황토빛 성벽 메디나. 새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뤄 신비롭게 아름답다. |
낮에 뭔가 먹을 것을 사놓지 않으면 먹을 게 없다. 그것도 숙소 안에서만 먹을 수 있다. 내가 묵은 숙소의 주인 아저씨는 “문도 걸어잠그고 먹어야 한다”고 주의를 줘 웃음이 났다. 외국인 여행자가 많은 다른 도시는 좀 다르겠지만 이곳 라바트는 여행객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철저히 현지인들의 생활방식 위주다. 그래서 이곳이 더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잘 안 통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제한되어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곳이 더 재미있다. ‘지생크(G5)’라는 지역은 시장이 있는 곳인데 우범지대로 알려져 있다. ‘생크(cinq)’는 프랑스어로 숫자 5를 의미한다. 모로코에선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가 흔히 쓰이지만 주된 공용어는 물론 아랍어다. 그러면서도 ‘베르베르인’의 언어가 남아 있는 곳이다. 북아프리카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은 아랍인에 의해 밀려나서 지금은 사막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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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범지대로 알려진 지생크(G5) 시장의 풍경. 사람들이 쓰다가 내놓은 온갖 중고품이 가득하다. |
그곳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스무살도 안 된 소녀 ‘도니아’를 만났다. 까만 피부에 예쁜 미소를 가진 도니아는 소리를 거의 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와 누구보다도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도니아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시장을 구경시켜줬고,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돌아다녔다. 그녀의 말을 내가 알아듣고 나의 말을 그녀가 알아듣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면서 자신은 말을 못하니 메일로 써 달라고 했다. 도니아의 가족을 만났다. 그녀의 어린 동생은 내 카메라에 큰 관심을 보였다. 꼬마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이 가리키는 것마다 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찍으면 꼭 확인을 시켜줘야 했다. 꼬마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고, 그 사진을 보여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 헤어질 때쯤 도니아가 “까두(선물)”라면서 뭘 건넨다. 작은 종지 그릇인 ‘따진’ 두 개다. 내 주머니에 그들에게 줄 선물이 없다는 아쉬움에 포옹으로 그들과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점심 때가 한참 지났으니 배가 고팠다. 음식을 팔 만한 가게들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먹을 수 있는 건 음료수 한 잔뿐이었다. 그것도 큰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가게 안 구석에서 마시라고 했다. 하필 라마단 기간에 이 나라를 여행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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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생크(G5)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소녀 도니아와 그녀의 동생. 도니아는 비록 말을 못하지만 밝게 웃는 모습만은 세상 어느 여인보다 아름답다. |
우연히 ‘아지즈’라는 남자와 친하게 됐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치고 그의 집에 갔다. 저녁 파티에 오라고 초대하기에 “다시 이 길을 헤치고 찾아올 수 있다면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는 파티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나는 “마을을 더 구경하고 오겠다”고 말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그 미로 같은 마을에서 나는 아지즈의 집뿐만 아니라 나가는 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것마냥 헤매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나에게 구세주가 되어준 어떤 친구를 만났다. 그는 친절하게 메디나 입구까지 길을 안내해줬다. 아지즈의 집에 가야 한다고 하니 펄쩍 뛰면서 “아지즈는 위험한 사람이니까 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신기하게도 그때 아지즈가 나타났다. 두 남자는 나를 놓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서로를 가리키며 나쁜 사람이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나쁜 사람인지 알려면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싸우는 둘을 버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확실히 모로코인들의 호의는 조심해야 한다.
메디나 안은 편안하다. 이곳에는 관광객도 없고 호객행위도, 쓸데없는 호의도 없다. 모두가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다. 모로코는 여전히 히잡을 쓴 아랍 여인이 다니고, 어디선가 민소매 옷을 입은 여자들이 활보하기도 한다. 유럽식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모스크의 알라 소리를 듣고, 얼굴은 백인인데 머리는 흑인처럼 곱슬곱슬한 사람을 볼 수도 있다. 여러 문화·종교·인종이 섞여서 융합되지 않은 채 뒤엉켜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독특한 문화를 만드는 ‘마로크’(Maroc·모로코의 프랑스어)와 ‘마로캥’(Marocan·모로코인)이다.
강주미 여행작가·‘중동을 여행하다’ 저자 grimi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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