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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만난 세상] 요리 배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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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에 할머니는 내가 부엌에 드나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번은 부엌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몰래 들어갔다가 할머니에게 들킨 적이 있다. 그 때 할머니가 혼내면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사내 녀석이 부엌에 들어오면 큰일을 못한다. 결혼해서도 부엌엔 얼씬도 하지 말아라.”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부엌 출입금지’는 어머니에게 대물림됐다. 어머니도 “사내는 바깥일을 해야 한다”며 부엌 출입을 못마땅해했다. 어린 시절 나는 사내들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100가구 정도 사는 우리 마을에서 부엌은 사내아이들이 드나들 수 없는 ‘금남의 공간’이었다. 불과 40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 세대의 부엌 출입금지는 더했을 것이다. 그 후 도시에서 사는 나는 가끔, 물이라도 마시러 주방에 갈 적엔 할머니가 꾸짖던 기억이 떠올라 회상에 잠기곤 한다.

부엌을 금남의 공간으로 알고 자란 세대가 요즘 요리 배우기에 푹 빠졌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문화단체들이 마련한 요리강좌에 50대, 60대의 중년 남성들이 북적거린다. 광주문화재단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요리강좌의 수강생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 대부분이다.

지난달 요리강좌에서 만난 50대 후반의 한 중년 남성은 은퇴 후 가장 힘든 게 혼자 밥먹는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결혼 후 25년간 줄곧 중소기업에서 한 달 200여 만원을 벌어 아내와 자식 2명의 생계를 책임졌다. 지난해 자녀를 결혼시킨 후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이제 좀 편히 살면서 황혼의 여유를 즐길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은퇴 후 10여 일이 지났을 때 “내일부터 밥은 혼자 차려드세요”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엄포가 아니었다. 그날부터 아내는 거의 날마다 오전 10시만 되면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나가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 추천으로 요리강좌를 찾았다는 것이다.

요즘 항간에 떠도는, 은퇴한 남편에 관한 유머에는 모두 ‘밥’이 들어간다. 은퇴 후 집에서 밥을 한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 한끼 먹으면 ‘일식씨’, 두끼 먹으면 ‘두식군’,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삼식이’라고 부른다. 이 삼식이 시리즈는 수그러들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버전으로 진화하고 있다. 급기야 삼식이가 간식까지 챙겨 달라고 하면 ‘종간나 새끼’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등장했다.

요즘 은퇴 후 밥타령만 하다간 밥상 대신 이혼청구서를 받기 십상이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있다. 이런 세태만 탓할 수 없다. 은퇴하기 전 부엌과 가까이하며 요리를 배워 밥 굶지 않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은퇴한 남자들에게 부엌과 요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땀 흘려 배운 요리솜씨로 평생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밥상을 차려준다면 더 근사한 남편으로 대접받지 않을까.

중년 남성들이 금남의 공간에서 요리하고, 게다가 혼자 먹는 것을 할머니가 본다면 질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게 현실인 것을.

한현묵 전국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