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섭씨 30도를 넘나들던 6월 초. 고구려 담징의 벽화가 있는 호류지(法隆寺)로 유명한 일본 나라(奈良)현의 고후쿠지(興福寺)에서였다. 사슴이 뛰노는 나라공원 첫 자락에 자리한 세계문화유산 고후쿠지는 일본의 유력 귀족인 백제계 후지와라(藤原) 가문에 의해 710년 창건된 고찰이다.
절에 있는 12점의 일본 국보 가운데 높이 51m의 목조5중탑 앞에서 여행잡지를 뒤지던 우리 앞에 나이 지긋해 보이는 여성이 한국말을 하며 다가왔다. 발음도, 구사하는 단어도 모두 훌륭했다.
가이후 가쓰코. 65세의 한국 관광객을 위한 자원봉사자였다. 그는 A4 클리어 파일 속에 자신이 직접 한글로 적은 자료를 보여주며 5중탑을 비롯해 고후쿠지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에선 절의 부처 등을 지키기 위해 절 옆에 신사(神社)가 있다는 문화적 설명도 잊지 않고.
30여년 전 상사 직원인 남편을 따라 2년 반 동안 한국에 살면서 우리나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당시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우려 때문에 처음 6개월간 한국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몰래 한국 사람을 만나며 한국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귀국 후에도 한국어 배우기는 이어졌다.
그는 남편이 퇴직하고 자식도 다 자라자 자원봉사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고후쿠지 1회, 근처 나라박물관 2∼3회 등 매월 5∼6회 정도 한국인이 많이 찾는 곳에서 가이드 봉사를 한다. 친구들을 모아 통역 겸 안내를 맡아 한국도 찾는다. 백제 유적이 많은 부여 등에는 벌써 30여 차례나 방문했단다.
한국에 국립박물관이 몇 개냐고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고 그는 전했다. 일본은 4개뿐이지만 한국은 12개나 되기 때문이라며 ‘빵터지’는 말도 이었다. “한국은 보물을 국립박물관에 보관하려 하지만, 일본에선 개별 절이 보관하려는 경향이 강해 국립박물관을 채울 게 많지 않아서죠.”
가이후만 그런 게 아니다. 80세의 미우라 유이치로(三浦雄一郞)는 지난달 23일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에 올라 최고령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을 세워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70, 80세에 포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80세가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인생이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2020년쯤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계 최고 ‘노인대국’ 일본. 고립사와 ‘노후난민’ 등도 적지 않지만, ‘가슴 뛰는’ 제2, 제3의 인생을 여는 이들이 더 많아 보인다. 70세가 넘어 작가로 등단하는 할머니, 80세 직장인, 90가 넘는 무수한 자원봉사자들….
이런 모습은 일본 노인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한 배경이겠지만, 구조적으론 각종 법률과 제도 등으로 그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여건과 문화를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에는 시민들이 주체가 돼 운영하는 평생학습기관 간다(神田)잡학대학이 있다. 1999년 창립 이래 매주 금요일 오후 6시부터 2시간 동안 제2, 제3의 인생을 위한 600회 이상의 무료강의를 제공해왔다. 강사도, 수강자도 대체로 나이가 지긋하다. 학습 질을 좌우할 강사는 무려 500명 이상 확보돼 있다고 한다. 이런 평생학습 기관이나 프로그램이 일본 중앙정부는 물론 지자체와 도서관 등 공공기관에는 수없이 많다.
최근 민주당 도종환 의원 등이 2월 작고한 박철수 영화감독의 유족 측이 제기한 소송을 돕기 위한 탄원서를 법원에 냈다. 보험사가 박 감독에게 65세 정년을 획일적으로 적용했다는 것이다. 아직 ‘잘못된 정년제’에 얽매어 있는, 2026년 65세 이상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가 예고되는 한국의 법과 제도의 단면을 보여주는 슬픈 자화상일 터다. 나라의 고호쿠지에서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을 가이후가 벌써 그리운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김용출 도쿄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