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지본(밀랍 처리가 안 된 실록)과 비교해 보면 누가 봐도 밀랍이 훼손의 원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밀랍이 분해되면서 생긴 산성 성분이 종이를 손상시키는 거죠.”
세종실록 밀랍본(왼쪽)은 한눈에도 훼손이 심각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밀랍하지 않은 숙종실록(오른쪽)은 훼손이 없이 깨끗하다. |
조선은 태백산·정족산·적상산·오대산에 사고를 만들어 실록을 보관했다. 1181권으로 분량이 가장 많은 정족산본의 태조∼명종 실록만 밀랍을 했다. 나머지는 생지본이다. 이 실장은 “밀랍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힌 기록은 없다. ‘동의보감’ 등의 문헌에 밀랍이 방충·방습에 좋다는 언급이 있어 이런 효과를 기대한 게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밀랍본은 시간이 지나면서 곰팡이가 생기고, 종이가 부서지는 등 훼손이 진행된다. 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태조실록∼명종실록 614권 중 상태가 불량한 것이 131권인데 대부분이 밀랍본이다. 특히 세종실록 86권의 훼손이 심각하다. 밀랍의 문제를 확인하면서 명종실록 이후에는 밀랍본을 만들지 않은 게 아니냐는 짐작도 가능하다.
복원기술 연구의 핵심은 탈랍, 즉 훼손의 원인인 밀랍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실장은 “밀랍의 양이 많으며 훼손이 더 심각하다”며 “종이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밀랍만 제거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탈랍을 하게 되면 실록의 원형이 손상되는 것으로 문화재 보존의 원칙에 반한다. 그러나 밀랍의 분해가 진행되는 상태를 그대로 둘 경우 실록의 훼손을 막을 방법이 없어 탈랍은 불가피한 선택이 된다. 연구소는 밀랍본의 종이와 가장 유사한 한지를 선정해 밀랍본 시제품을 제작하고 온도, 습도, 공기질, 미생물 등 인자별 영향을 점검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은 ‘초임계유체추출법’이 최적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액체와 기체로 구분할 수 없는 상태의 유체를 용매로 사용해 밀랍을 녹여내는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규식 복원기술실장이 조선왕조실록 밀랍본 복원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
이제 남은 것은 연구 결과를 실록 원본에 적용해 보는 것이다. 원본의 변형 문제가 걸린 만큼 문화재위원회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연구소로서는 8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둘 수 있을지 가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실장의 자신감은 강했다. “원본을 최대한 재현해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적다고 본다. 실록 복원을 위한 모든 기술은 확보됐다”고 말했다.
그는 “밀랍본의 상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서서히 손상이 진행돼 상응하는 복원조치가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복원 사업을 책임질 주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정족산본 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혹은 별도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적당하지 않겠느냐는 게 이 실장의 판단이다. 국민의 관심도 주문했다.
“숭례문 복원을 통해 볼 때 문화유산의 보존·관리는 국민의 사랑과 관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실록에도 이런 관심이 계속된다면 복원에 차질이 없을 겁니다.”
대전=글·사진 강구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