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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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길을 가는 한 사내 그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입력 : 2013-07-19 21:39:26
수정 : 2013-07-19 21: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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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20년 김경욱 새 장편소설 ‘야구란 무엇인가’ 출간
모든 게 정치적으로 풀이되는 한국 사회에서 야구라고 예외가 아니다. 호남 세력이 정치 무대에서 철저히 소외된 1980∼90년대 호남인들은 정치 대신 야구에 모든 것을 걸었다. 호남 출신 정치인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는 동안 호남에 연고를 둔 해태타이거즈(현 기아타이거즈)는 무려 9차례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덕분에 호남인들은 정치에선 느끼지 못한 짜릿한 승리감을 야구에서 실컷 맛볼 수 있었다. 해태의 우승은, 적어도 전라도 사람들에겐 단순한 야구 승리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소설가 김경욱씨는 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을 차례로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새 장편 ‘야구란 무엇인가’는 1980∼90년대 호남인에게 야구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해태타이거즈는 어떤 팀이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문학동네 제공
소설가 김경욱(42)씨가 등단 20주년을 맞아 새 장편소설 ‘야구란 무엇인가’(문학동네)를 펴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남긴 상처, 희생자 가족의 분노와 회한, 호남 사람들 특유의 야구를 둘러싼 애증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5·18 때 동생을 잃은 한 사내가 주인공이다. 공부를 잘해 앞날이 촉망되던 동생은 1980년 봄날 형이 보는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사내의 아버지는 동생을 구하지 못한 책임을 형에게 물어 죽을 때까지 그를 미워했다. 사내는 동생을 사망케 한 계엄군 병사의 이름 석 자를 똑똑히 기억한다.

소설은 사내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슬픔에 사로잡힌 사내는 장례 절차를 마친 뒤 어린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아들에겐 그냥 ‘여행’이라고 둘러댔지만, 실은 동생의 원수인 계엄군 병사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서다.

아들은 학교에서 ‘이상한 아이’로 낙인이 찍혀 특수학교에 보내질 처지다. 그들 부자는 정상적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둘의 공통 관심사는 오로지 야구, 그리고 해태타이거즈를 응원하는 마음뿐이다. 일례로 사내는 아들한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대신 “내가 선발투수이고 너는 구원이니까 불펜에서 대기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아들은, 그래야 알아듣는다.

보복을 위해 전국을 떠돌던 부자는 마침내 서울 근교에서 원수의 흔적을 찾는다. 해태타이거즈가 서울에 연고를 둔 팀과 잠실야구장에서 맞붙는 시점에 사내는 홀로 조용히 복수의 칼날을 간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옛날의 그 계엄군 병사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있다. 병원에 따르면 가만히 놓아둬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란다. 사내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책 말미에 저자는 “야구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다. 야구에 대한 소설이 아니듯 5·18에 관한 소설도 아니다. 김씨 작품은 흔히 말하는 ‘5월문학’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5·18이 매우 중요한 소재이긴 하나 그보다는 ‘복수’의 본능과 ‘재기’의 욕구라는 우리네 보편적 인생사를 다룬 측면이 훨씬 강하다. 다만 작가는 소설을 통해 80∼90년대 호남인에게 야구란 과연 무엇이었는지, 해태타이거즈는 어떤 팀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들한테 되묻는다, “당신에게 야구는 무엇이냐”고.

짧고 감각적인 문장들의 조합이라 술술 읽힌다. 독자들이 소설을 보고 한 번쯤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에게 야구는 과연 무엇인가.’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