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라는 동음을 갖는 성씨는 대략 4가지이다. 하나는 베풀 장(張)을 쓰는 성씨이며, 다른 하나는 글 장(章)을 쓰는 성씨이고, 세 번째는 성할 장(莊)을 쓰는 성씨이고, 네 번째는 줄 장(蔣)자를 쓰는 성씨이다.
우리나라의 장씨에는 네 성씨가 모두 있다. 장(張)씨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성씨 중 9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씨이며, 장(章)씨에는 거창장씨가 있고, 장(莊)씨에는 금천장씨가 있으며, 장(蔣)씨에는 아산장씨가 있다. 또 영월엄씨로 알려진 엄(嚴)씨도 장(莊)씨에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장(張)씨는 삼황오제 중의 하나인 황제 헌원(軒轅)의 손자인 휘(暉)가 아홉 개의 별을 보고 활과 화살을 제작하여 제사를 주관하고 성을 장(張)으로 정했다고 한다. 처음엔 장(長)이라고 정했다가, 활과 관련이 있다 하여 활 궁(弓)을 붙여 장(張)이 되었다. 진나라 재상이었던 장의,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등이 장씨 성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보고의 아버지인 장백익(張伯翼) 때부터 장(張)이라는 성씨가 보인다. 하지만, 장보고(張寶高)의 처음 이름이 궁복이었고, 그가 당나라에 건너간 뒤에 장씨 성을 삼았던 사실로 볼 때, 아마도 장보고가 최초의 장(張)씨 성을 가졌던 인물로 파악된다.
안동 태사묘 전경. 김선평, 김행(후에 권행), 장정필 등은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공으로 태사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안동시에는 이를 기리는 삼태사묘가 있으며, 이들은 각각 안동김씨의 시조(김선평), 안동권씨의 시조(권행), 안동장씨의 시조(장정필)가 되었다. |
우리나라 장(張)씨는 80여만명으로 전체 성씨 중에서 윤씨에 이어 아홉 번째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 장(章)씨는 장(張)씨와 달리 주나라의 공신이었던 강태공의 강씨(姜氏)에서 분파한 성씨로 알려지고 있다. 그 시조가 되는 장한(章邯)은 기원전 진나라 말기, 하북의 진나라 주력부대의 장군이었다. 우리나라 장(章)씨의 시조는 중국 송나라 건주 사람인 장종행(章宗行)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는 고려 충렬왕 때 귀화하여 예문관 대제학과 춘추관사를 지냈다. 장(莊)씨 역시 중국 계통의 성씨인데, 초나라 장왕(莊王)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전국시대 송나라 출신인 장자(莊子)가 유명하다. 엄(嚴)씨는 장(莊)씨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후한의 광무제와 죽마고우였던 장광(莊光 또는 嚴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광무제가 집권한 뒤에 불렀으나, 거절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광무제는 장광을 그리워하여 그의 아들(명제 劉莊) 이름을 유장이라고 지었다. 그럼에도 장광은 조야에 나오지 않았다. 그 후 명제가 집권한 뒤 장씨를 엄(嚴)씨로 바꾸게 하고, 황제의 이름(劉莊)에 들어가 있는 장(莊)자를 못 쓰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장(莊)자를 쓰는 성씨는 금천장씨이며 시조는 고려 명종 때 무신이었던 장보(莊甫)이다. 장(蔣)씨는 전국시대, 장나라가 망한 후에 그 유민인 공족들이 성으로 사용하였다. 유명한 인물로는 중화민국 초대 총통이었던 장개석(장제스)이 있다. 우리나라의 시조는 송나라 신경위대장군인 장서(蔣壻)라고 전하며, 본관은 아산이다. 유명 인물로는 조선의 에디슨으로 불리는 장영실(蔣英實)이 있다.
장보고 동상. 장보고가 당나라 무장으로 재직할 때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에 있는 법화원에 장보고의 동상이 있다. |
안동장씨의 시조는 충헌공(忠獻公) 장정필(張貞弼)이다. ‘안동장씨대동속보(安東張氏大同續譜)’에 따르면, 그의 처음 이름은 장길(張吉)인데, 888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인 장원(張源)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5세 때 아버지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가 18세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다가 다시 환국하였다. 930년에 고창전투에서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의 군대를 대파한 공으로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 태사(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太師)에 오르고 고창군에 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장정필의 후손(손자) 이름에 인동장씨의 시조인 장금용이 있어, 인동장씨도 안동장씨에서 파생되어 나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인동장씨 측에서는 장정필의 후손 장금용과 인동장씨의 시조 장금용이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없다며, 이를 부인하고 있다.
현재 안동장씨의 파에는 화산군파(花山君派), 부령군파(扶寧君派), 예산군파(禮山君派), 청송군파(靑松君派), 지례백파(知禮伯派), 진천군파(鎭川君派), 이천백파(利川伯系), 울진부원군파(蔚珍府院君派) 등이 있고, 그외에도 60개의 소파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시조인 장정필을 비롯하여 화령백인 장려(張儷), 화산부원군인 장사길(張思吉), 장양공인 장철(張哲) 등이 있으며, 장흥효(張興孝)의 딸로 최초의 요리책 ‘음식디미방’을 지필한 정부인 안동장씨가 있다. 현대인물로는 장준하 전 의원과 장기려 박사가 있다.
안동장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5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문과 4명, 무과 10명, 사마시 20명, 역과 16명, 의과 1명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에 따르면, 안동장씨는 총 2만5552가구에 8만39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인 안동장씨가 지은 최초의 요리서 ‘음식디미방’. 정부인 안동장씨는 학자였던 장흥효의 딸로 시문에 뛰어났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짓기도 했다. 이문열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다. |
안동장씨 대종회에 따르면 안동장씨의 시조 장정필은 청해진대사로 유명한 장보고(張保皐)의 현손(고손)이라고 전한다.
즉, 장보고가 신라의 왕위 쟁탈전에 참여하고, 딸의 혼사문제로 신라조정과 갈등했는데, 조정에서 염장을 파견하여 장보고를 살해했다. 그 후 청해진세력은 전북 김제(벽골군)로 옮겨가 살도록 했다. 이때 장보고의 혈족들이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며, 장보고의 증손인 장원(張源)이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절강성 소흥부에 거주하면서 안동장씨의 시조인 아들 장길을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장보고 사후 그 혈족들에 대한 실증적 사료가 부족하여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즉, 장보고의 혈족들이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살았다는 것도 알 수가 없고, 또 그 혈족의 후손이 안동장씨의 시조인 장길이라는 것도 추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안동장씨는 고려 후기 화령백인 장려(張儷) 이후 가문이 크게 융성했다. 장려는 시조 장정필의 13대 손으로 조부는 문하평리 좌정승을 지낸 장양우(張良佑)이며, 아버지는 정헌대부 좌리공신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낸 장수명(張壽命)이다.
그는 충숙왕 때 문과에 올라 예의판서와 문하우정승을 지냈다. 한때 왕에게 간언했다가 의주목사로 좌천되기도 했지만,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에게 두 아들(장사길, 장사정)과 손자(장철)를 보내 회군토록 했다. 장려의 부인인 곡산강씨는 강윤성의 딸로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와 자매지간이다.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 영정. |
이로써 회군공신의 반열에 오르고, 회군 뒤에는 이지란과 함께 왜구를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조선 개국에 공헌한 뒤, 왕자의 난 때는 동생(장사정), 아들(장철)과 함께 이방원(태종) 편에 서서 활약하였다. 이로써 진충협찬정란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세종 1년 향년 79세의 나이로 졸하니, 상왕인 태종이 직접 사제(賜祭, 왕이 제를 치러줌)하였다.
장철(張哲)은 장사길의 셋째아들이다. 고려 말기 무과에 급제하여 아버지 장사길과 함께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웠고 첨절제사, 영흥부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그는 왕자의 난 뒤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은거할 때 사신으로 갔다가 태조 곁에 머물렀다. 태조가 돌아온 뒤, 영흥부사를 자청해 낙향했다.
그밖에 조선시대 안동장씨의 유명 인물로는 학자로는 장흥효(張興孝), 장세량(張世良) 등이 있으며, 홍경래의 난 때에 크게 공을 세운 장몽열(張夢說), 장낙현(張洛賢) 부자도 있다.
또 장흥효의 딸로 정부인 안동장씨가 유명하다. 그녀의 본명은 장계향(張桂香)으로 학자였던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시문에 능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하였다. 참봉인 이시명과 결혼하여 8남매를 훌륭하게 키워 숙종 때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퇴계학통을 이은 남인의 이론가 이휘일, 이현일 등이 그녀의 아들들이다. 이문열의 소설인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화산부원군 장사길의 묘 시향. 경기도 파주시 금촌에 있는 화산부원군 장사길의 묘에서 안동장씨 문중이 시향을 올리고 있다. |
안동장씨의 현대인물에는 장기려 박사와 장준하 전 의원이 유명하다.
장기려(張起呂) 박사는 의사로 평북 용천 출신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 전신)와 나고야대학을 나왔다. 6·25 때 월남하여 전상자와 극빈환자에 대한 무료치료로 인간애를 실천했다. 1951년에는 피란민을 위한 영도 복음병원을, 1958년에는 행려병자를 위해 무료진료소를 차렸다. 그로 인해 1979년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장준하(張俊河)씨는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1944년에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경으로 가 광복군 대위가 되었다. 중국 서안(西安)에서 국내 밀파 훈련을 받고 대기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직을 수행했다. 1953년에 ‘사상계’를 창간하여 자유, 민주, 통일, 반독재투쟁에 헌신했다.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박정희 정권에서 민주화투쟁으로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였는데, 75년 8월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산행 중에 추락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을 놓고 권력에 의한 타살과 단순 추락사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저서에는 ‘돌베게’가 있다.
그외 안동장씨 현대 인물로는 의학계에 장주해(가톨릭의대 교수), 장석종(충남대의대 교수), 장하일(외국어대 교수)가 있으며, 재계에서는 장규섭(동명내화공업 회장), 장인섭(동원토질 대표), 장하구(종로서적 회장), 장기봉(신아일보 사장)씨 등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