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휴가 복귀 후 첫 공식석상인 이날 국무회의에서 ‘잘못된 관행’과 ‘새로운 변화’를 누차 강조하며 “기본을 바로 세우자”고 역설했다. 회의록 실종 사태에 대한 발언은 이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최근 알려진 사건들만 봐도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잘못들이 많다”며 여당발 조어인 ‘사초(史草) 실종’을 처음으로 직접 언급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특히 원전 비리 같이 기업이 고위 공직자와 결탁해 국민 안전을 도외시한 채 제 잇속을 챙긴 파렴치한 범죄를 사초 실종과 동일시하며 싸잡아 비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발언의) 앞뒤를 보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며 나열한 사안 중 하나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정치권이 회의록 실종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 검찰 수사를 의뢰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이를 대놓고 거론하며 야당, 특히 친노(친노무현) 진영의 거센 반발을 예상하지 않았을 리 없다. 박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우선 검찰 수사든 특검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초 실종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엄명’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노무현·이명박 두 정부에서 발생했을 개연성이 큰 만큼 자신과 무관한 사안이니 개의치 않겠다는 자신감도 바탕이 됐다는 관측이다. 민주당은 “국정원 의혹 등 4대 사건 입장 표명부터 하라”고 반박했다.
천막 상황실 6일째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운데)가 6일 서울시청 앞 광장 내 국민운동본부 천막 상황실에서 열린 당 상임고문단과의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
장외투쟁까지 불사한 야당에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의지도 엿보인다. 여당의 검찰 고발로 정국의 초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과 회의록 실종 사태에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로 전환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회의록 실종 사태를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NLL 정쟁의 불씨를 살려 정국 이슈를 ‘사초 증발사건’에 묶어두는 한편 민주당의 ‘아킬레스건’인 친노, 비노 간 갈등을 자극하는 다목적 카드일 수 있다. 당장 민주당은 “계파 분열을 자극해 5자회담에서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려는 것”이라는 경계심을 표출하고 있다. 김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국정조사 관련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 요구를 물타기하려는 시도는 아닌지,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준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이 5자회담을 해도 야당에 딱히 줄 수 있는 ‘선물’이 없고 야당도 단독 회담에 여전히 미련이 큰 탓에 향후 청와대의 대야 관계는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비교적 온건파로 꼽히며 야당과의 대화에 무게를 뒀던 허태열 전 비서실장에 비해 2기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의 심기 보좌에 더 전념할 가능성이 큰 김기춘 비서실장이 전면에 나서면서 ‘밀어붙이기식’ 대응에 주력할 공산이 커 보인다. 청와대는 민주당이 5자회담 카드를 끝내 받지 않을 경우 대화 제의를 없던 일로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홍 기자 ho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