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팀 메이라는 운동가가 공산당선언을 흉내 낸 ‘암호화 무정부주의자 선언’이라는 것을 공표했다. 이 선언에서 그는 암호화된 통신과 익명성을 가진 온라인 네트워크가 정부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경제활동을 컨트롤하고, 정보는 비밀리에 유지되는 그림을 그려냈다. 당시의 암호화 기술을 중심으로 한 이런 문화는 네트워크가 확대될수록 정부와 같은 빅브러더의 통제가 커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탈출구의 역할을 했고, 1990년 초반 다양한 암호화 기술에 심취한 해커들이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기도 했다. 1993년에는 클린턴 행정부가 암호화 칩셋인 클리퍼 칩이라는 것을 만들어 공공부문에서 사용하는 것을 강제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휴대전화를 통한 다양한 감시·감청을 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부 등에서 주도한 중앙집중적인 기술보다 산업계와 개인은 네트워크에서의 자유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싸운 결과 해당 법안을 좌절시킨 역사도 있다.
정지훈 경희사이버대교수·미래학 |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경제적 관점, 기술, 행정 편의적인 시각에서만 접근했다. 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논쟁, 그리고 미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대책은 주민등록번호를 대체하는 개인식별번호(I-Pin)를 전면적으로 이용한다거나, 외국인들이 쇼핑몰을 이용할 때 공인인증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피상적인 수준에 그친 것만 쏟아지고 있다. 이제는 보다 많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상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에 대해서도 더 고민을 하고, 그런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네트워크의 강력한 힘을 통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혜안을 찾아야 한다.
아마도 이제는 더 이상 숨을 곳도 없고, 사실상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거의 사라지는 세상에서 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를 내가 개방할 것이며, 어떤 것을 보호할 것인지 정도는 개인의 자유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제공돼야 한다. 물론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보호하려면 할수록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고 불편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내 필요에 의해 명시적인 거래가 이뤄지도록 하는 그런 배려는 필요한 게 아닐까. 무조건 법률만 강화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서비스를 쓰지 못하게 하며, 중앙통제적인 인증과 관리시스템을 주면서 서비스 제공자에게는 면죄부만 주는 현재의 시스템은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정지훈 경희사이버대교수·미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