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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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조사 내세워 문화재 파괴·약탈… 제국주의 열강의 만행

‘약탈 문화재는…’ ‘중국문물유실사’ 출간
중국에서 서역으로 이어지던 실크로드의 요충지에 자리 잡았던 고대 쿠차왕국(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 쿠차현 지역)의 한 사원에 부처의 발자국으로 알려진 흔적을 간직한 옥석이 있었다. 1898년 사원을 찾은 러시아인 코스로프는 옥석을 빼돌리려 했지만 2t이 넘는 무게 때문에 운반할 수가 없었다. 로스코프의 해결책은 무자비했다. 옥석을 두 조각으로 잘라버린 것. 

조각 난 옥석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이 문화재에 벌인 만행을 상징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일들이 ‘학술 조사’ 혹은 ‘문화재 연구’라는 이름 아래 공공연히 벌어졌다는 점이다. 중국으로선 치욕적인 과거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 유린된 한국도 같은 아픔을 겪었다. 최근 잇달아 출간된 ‘약탈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아라이 신이치 지음, 이태진·김은주 옮김, 태학사)와 ‘중국문물유실사’(장저성 편, 박종일 옮김, 인간사랑)는 한국·중국에서 벌어진 이 같은 만행을 증언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이른바 ‘탐험대’를 조직해 중국의 오지 곳곳에서 문화재를 절취하고 파괴했다. 사진은 둔황에서 고대의 문서, 전적 등을 빼돌린 영국 스타인의 탐험대.
인간사랑 제공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화재를 조사, 발굴하는 작업을 벌였다. 순사들은 무장을 한 상태로 이런 작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태학사 제공
◆문화재 빼돌리고 파괴한 제국주의 열강

정치·군사적 선점을 위한 정보 수집 혹은 지배 논리의 개발이란 목적 아래 학술조사, 문화재 연구를 벌인 제국주의 열강이 한국과 중국의 유물을 소중하게 다뤘을 리는 만무하다. 닥치는 대로 빼돌렸고, 필요하다면 파괴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1909년 세키노 다다시는 한국의 고건축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청사건설이나 도시개발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키노는 ‘갑·을·병·정’으로 마치 학생 성적표처럼 등급을 매겼다. ‘갑’은 가장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것, ‘병’과 ‘정’은 보존의 가치가 작은 것이었다. 세키노의 판정은 한국 건축물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준이 됐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경희궁 내 많은 전각은 ‘병’ 판정을 받았고, 1910년 합방이 되면서 파괴됐다. 그 자리에는 일본인 학교가 세워졌고, 간신히 남은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애도하기 위해 세운 박문사(博文寺)의 대문인 춘경문(春慶門)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1876∼1928년 중국의 서북지역을 찾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스웨덴 등의 42개 ‘탐험대’는 멋대로 문물을 절취하고 불법적으로 고대 문화유적지를 파헤침으로써 중국 문물의 대량 파손과 유실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둔황(敦煌)이다. 이곳에서 당나라 시대 불경 수만권과 회화, 불상 등이 있는 16호굴의 ‘장경동’(藏經洞)이 발견된 것은 1900년 6월이었다. “세계사에서 경사스러운 일로 기록되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1907년 외국인이 찾아들면서 약탈과 재난이 시작됐다. 영국인 오렌 스타인은 둔황을 찾은 첫 외국인이었다. 스타인은 “보는 눈이 없는 한밤중에 조용하게 물건을 날랐고”, 9000개의 두루마리와 500장의 그림을 손에 넣어 자국으로 보냈다. 이후 프랑스인 폴 펠리오,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 등이 차례로 둔황을 찾아 비슷한 짓을 벌였다. 둔황을 비롯해 중국 서북지역 여려 곳에 세 차례에 걸쳐 탐험대를 파견한 오타니의 컬렉션 중 일부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소장품으로 한국에 남아 있다.

◆피해국의 무지·무관심도 문제

당시 문화재 약탈의 1차적인 책임은 열강이 져야겠으나 한국, 중국의 무지와 무관심, 무능력도 일조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에 눈이 멀어 귀중한 유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가 하면 문화재 약탈을 넋놓고 지켜봤기 때문이다.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124호)이 일본으로 넘어간 사연은 기가 막힌다. 1911년 와다 유지는 “땅에서 솟아 나왔다”는 전설을 가진 강릉 한송사의 불상을 추적했다. 불상이 칠성암이라는 곳에 있다는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지, 손에 넣는 건 쉬웠다. 불상을 넘기라는 와다의 요청에 칠성암은 “융숭한 제사를 올리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제사 비용만 내면 불상을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와다가 불상을 가지는 데 들인 비용은 고작 ‘약간의 제사 비용’이었던 셈이다. 1912년 일본으로 밀반출된 불상은 1966년 한·일협정이 맺어지고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지금의 온천군 성현리)에 있는 점제현비는 1913년 9월 조선총독부의 고적 조사를 통해 발굴된 낙랑의 유적 중 하나다.
태학사 제공
둔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곳에는 도교 도사 왕원록이 있었다. 장경동을 발견하고, 관리까지 맡았던 왕 도사는 외국인 탐험대가 도교 사원을 짓는 데 쓰라며 시줏돈 몇 푼을 쥐어주면 유물을 넘겼다. 스타인이 1차 둔황 탐사에서 1만점에 가까운 유물을 얻으면서 왕 도사에게 지불한 돈은 은 4덩어리에 불과했다. 프랑스인 펠리오는 은화 500냥을 건네고 6000여건의 두루마리를 손에 넣었다.

당시 둔황의 관리나 중국 정부의 무관심도 한몫했다. 이슬람교도인 현지의 관리들은 불교 문화재가 유출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또 중국 정부는 둔황의 유물 수만점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으로 빠져나간 이후에야 상태가 양호한 필사본을 베이징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