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특파원리포트] 전문직 비자 로비 과연 善인가

입력 :
수정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美 ‘E-4’ 쿼터 유학생에 절실
정부 섣불리 로비땐 인재유출 우려
아는 기러기 가족이 있다. 재작년까지 네 식구가 미국에서 함께 생활했다. 회계사인 가장 A씨는 재미동포가 운영하는 회사에 다녔다. 연봉 7만달러를 받는 전문직이었다. 그는 어느 직원보다 열심히 일했다. 사장이 한국으로 출장을 떠나면 다른 직원들과 달리 오히려 더욱 바빴다. 미국인 직원들은 퇴근하면 그만이다. 그는 밤중에도 미국인 비서를 대신해 대낮인 한국에서 오는 사장 지시를 처리해야 했다.

이민을 꿈꾸던 그는 늘 묵묵히 일했다. 워낙 성실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사장 눈밖에 나선 안 될 이유도 있었다. 미국 영주권을 신청하려면 회사가 스폰서 역할을 해줘야 한다. 계약기간 3년이 다 되어가면서 회사 태도가 달라졌다. 스폰서는 물론이고 3년 재연장 요청에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그는 자녀 교육문제로 부인과 아이들만 남긴 채 쓸쓸히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전문직 비자(H-1B) 신분의 비애였다.

H-1B는 미국 내 기업이 외국인 전문직을 고용할 수 있도록 발급하는 비자다. 부족한 고급 전문인력을 해외에서 들여와 미국 기업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다. 건축, 공학, 과학, 수학, 교육 등 전문 분야에서 학사 학위 이상자를 대상으로 한다. 미국 정부는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연간 H-1B 쿼터를 8만50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각국의 지원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매년 쿼터는 조기에 소진된다.

H-1B 쿼터에서 예외를 적용받는 국가가 있다. 캐나다, 멕시코, 싱가포르, 칠레, 호주로 모두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는 나라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과정에서 무제한의 쿼터를 받았다. 싱가포르와 칠레는 2003년 FTA 협정문을 통해 각각 5400명, 1400명의 쿼터를 확보했다. 2005년 미국과 FTA를 맺은 호주는 의회 입법을 통해 1만500명의 쿼터를 챙겼다.

우리나라도 한·미 FTA 협상 당시 쿼터를 협정문에 포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협상권한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나타냈다. 미 행정부는 2002년까지 FTA 협정문에 전문직 비자 쿼터를 보장했으나 칠레, 싱가포르와 FTA를 맺으면서 의회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았다. 비자 쿼터에 관한 사항은 의회 권한이라는 지적이었다. 호주가 의회 입법으로 전문직 비자(E-3) 쿼터를 받은 이유다.

박희준 워싱턴 특파원
H-1B 쿼터 확보는 우리 정부의 주요 대미외교 현안으로 올려져 있다. 한국을 위한 전문직 비자(E-4) 쿼터 1만5000명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동포간담회에서 약속까지 했다. 주미한국대사관은 오는 11월 중간선거 이전에 이민법 개혁안에 이를 반영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난해 1곳에 이어 올 상반기 2곳의 로비회사와 계약해 매달 5만5000달러를 지급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가 전문직 비자 쿼터를 확보하기 위해 로비까지 나설 일이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는 청년 일자리 창출과 글로벌 인재 양성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들이 앞으로 창조경제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미국에는 7만여명에 이르는 한국인 유학생이 있다. 학업 후 1년의 OPT 기간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귀국해야 하는 이들에게 E-4 쿼터는 절실하다. 재미 동포사회에 새로운 활력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과연 미국의 전문직 비자 쿼터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2년마다 갱신 가능한 E-4 비자로 미국에 머물며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할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인재 유출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또 한국인을 고용할 기업은 결국 재미동포가 운영하는 기업일 공산이 크다. H-1B 비자 쿼터의 50% 이상을 인도가 차지하는 것도 영어 구사 능력이 뛰어난 것뿐만 아니라 인도계 회사들이 인도인을 선호해서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점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충분한 논의 없이 박 대통령 방미를 계기로 무조건 절대선의 정책으로 추진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박희준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