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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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어사전 편찬 국가기구 설치 절실

오래전의 이야기다. 교수 휴게실에서 어느 교수가 국문과 교수인 내게 국어 단어의 맞춤법을 물어 본 적이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라니까 국어사전이 없단다. 영어사전은 갖춰 놓고 있으면서 국어사전은 구비해 놓지 않는 현실을 상기시켰더니 그 잘못을 인정하면서 대뜸 날아온 질문은 어떤 국어사전이 좋으냐는 것이었다. 몇몇 교수들이 내 말을 듣고 국어대사전을 거금을 주고 단체로 구입했다.

요즘은 국어학 전공자 교수에게 국어 단어나 한글맞춤법에 대해 질문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간단히 검색만 해도 즉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종이사전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홍윤표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장·연세대 명예교수
스마트폰으로 사전검색이 가능한 시대에 종이사전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강변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국어 어휘는 아마도 다른 사람의 글을 이해하기 위한 인지용 어휘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뜻풀이가 간단할수록 더 좋아서, 그 뜻이 여럿이면 오히려 혼란스럽다고 할 것이다. 단답형에 익숙해진 교육의 맹점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쓸 때, 어떤 단어를 골라 써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람, 즉 발표용 어휘를 습득하려면 검색만 가능한 디지털 사전만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국어사전이 편찬된 것만도 고마운 일이지만 이제는 OED(Oxford English Dictionary)와 같은 문화 선진국의 국어사전에 견줄 수 있는 종합국어대사전을 편찬해야 할 때가 왔다.

사전 편찬에는 사전 편찬을 위한 자금, 사전 편찬을 위한 이론적 틀을 제공해 주는 어휘론 및 사전편찬 학자, 그리고 사전편찬 실무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관은 국가기관밖에 없다. 개인이나 학회나 연구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자료 조사, 수집, 정리 및 연구 등을 위한 자금의 지속적인 공급과 사전 편찬 실무진의 부족이 가장 큰 애로이고, 출판사 등은 자금은 물론 전문 학자를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

국가기관이 사전 편찬을 한다고 이를 유일한 국어 전문기관인 국립국어원에 맡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국립국어원은 연구기관이 아니라 행정기관이어서 관리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두 용역을 줘 편찬할 테니, 사전 편찬이 끝나도 사전 편찬의 노하우가 축적되지도 않을뿐더러 전문 연구 인력도 양성하지 못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별도의 상설기관으로서 가칭 ‘국어사전 편찬원’을 설치해 상시로 새로운 어휘를 찾아내고 변화하는 어휘의 모습을 기술, 설명해 둬야 하며 기존의 국어사전을 대폭 수정·보완해야 할 것이다.

종합국어대사전이 편찬되면 여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국어사전이 등장할 것이다. 어원사전이 등장한다면 국어 어휘가 한자어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며, 속담사전이나 관용어사전은 국민이 우리말의 표현을 풍부하게 사용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며, 각종 의미사전은 어휘의 사용 폭을 넓혀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가기구가 설치되지 않고 기존의 국어사전을 근근이 수정·보완하는 수준의 관심으로는 ‘민족 지혜의 심장’은 ‘맥이 끊길 것’이라는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홍윤표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장·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