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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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에 이른 여섯 문인들, 지난 세월을 詩로 노닐다 어느덧 소년·소녀가 됐다

강민 시인 시선집 ‘외포리의…’ 출간회서 해후
팔순의 벗들이 오랜만에 9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신경림 민영 황명걸 박정희 서정란 시인과 극작가 신봉승 등이 그들이다. 우리네 세는 나이로 팔십을 넘겼거나 팔순 언저리에 도달한 이들이다. 모두 한 세월 건너오며 이름을 날린 문인들이라는 점도 같다. 벗 강민(81) 시인의 시선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참으로 긴 세월의 고개를 넘어왔구나/ 굽이굽이 80굽이/ 험하고 눈물 많던 고개, 고갯길/ 한 많던 굽이길, 가시밭길/ 그 길을 이렇게 쉽게 넘다니/ (중략) / 그 많던 동반들/ 아리고 아픈 내 사랑, 풀꽃 노을에 타버린/ 아리고 아픈 내 사랑/ 따뜻했던 피붙이, 그 친구, 그 여인들/ 이제는 손 놓고 떠난 이들/ 그 문 들어서 이제는 꿈의 본향 찾았는가”


팔십이 넘은 연치에도 견결한 문장이 돋보이는 강민의 ‘산수령(傘壽嶺)’이다. 1962년 ‘자유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시 동인지 ‘현실’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세대는 일제 강점기에 성장기를 보내고 청년기에 6·25전쟁을 겪었으며 팔팔한 20대에 전후 황폐한 1950년대를 보냈다. 이어 4·19, 5·16, 10월유신,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현장을 온몸으로 통과해 왔다. 이미 그들 표현대로 ‘저 위로’ 떠나간 이들이 더 많다. 이날 인사동에 모인 이들은 지나온 세월 막역하게 부대껴온 몇 안 남은 벗들이다. 강민 시인은 모두에 이런 인사말을 했다.

강민 시인의 새 시집을 축하하기 위해 모처럼 서울 인사동에 모인 팔순의 벗들. 왼쪽부터 강민 신경림 박정희 시인, 극작가 신봉승, 민영 황명걸 시인. 민영 시인은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 다 먼저 가고 이만큼만 남았다”고 웃었다.
“중학교 6학년, 요즘 학제로는 고3 때 6·25를 만났습니다. 피란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이여 안심하라고 방송하더니 자신은 대전 부산으로 도망가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해버렸습니다. 남은 이들은 발이 묶이고 무심히 다리를 건너던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물속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날 대한민국호는 이미 침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살아온 세월은 늘 배멀미를 하듯 어질어질했는데 세월호 참사에서도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니, 대체 달라진 게 무언지 답답합니다.”

그는 1950년 8월 또래의 인민군을 만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을 밝히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경안리’에서라는 시편에 적었다. 서로 적의는 없었다. 북에서 고급 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왔다는 ‘그’에게 ‘나’는 철없이 “북이 쳐 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다.

“하염없는 얘기로 밤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에 그는 떠났다/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그는 가고 없었다/ 냄새나고 지치고 더럽던 그의 몸과는 달리/ 새벽별처럼 총총하던 그의 눈길/ 1950년 8월 경안리/ 새벽의 주막 사립문가에서 나는 외로웠다”(‘경안리에서’)

강민 시인은 그때 이별의 인사말로 나누었던 “우리 죽지 말자”는 다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해 서럽다고 했다. 전후 폐허의 거리에 청춘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당시 문인들의 무대는 그나마 얼기설기 엮은 폐허의 건물더미 사이에 자리 잡은 명동의 술집과 음악다방이었다. 이날 어렵사리 만난 벗들도 그 시절 명동을 누비던 추억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었다.

민영(80) 시인이 시를 읊듯 말했다.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이 다 먼저 가버렸어. 강물을 지나서 바닷속으로 빠져버렸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도에 쓸려서 없어지고 말았어. 여기 온 사람들 몇 명만 남았어.”

강민 시인은 그들이 명동 시대에 이어 인사동을 누비던 시절을 추억하며 이렇게 적었다.

“늘 다니던 길인데/ 갑자기 물감을 뿌린 듯/ 내 눈에는 이상한 필터가 걸린다/ 동서남북이 분별되지 않는다/ / 그이가 떠난 여기는/ 스산한 여기는/ 내 마음의 황무지// 가면을 쓰고/ 물구나무 선 이들이 다가온다/ 그리운 이들이 나비처럼 춤을 춘다/ 황혼을 마신 이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갈 길 잃은 내가 헤매고 있다”(‘인사동 아리랑 4-황무지’)

연전에 아내마저 떠나보낸 강민 시인은 그리운 이들이 모두 떠나간 곳은 ‘황무지’라고 썼다. 노경의 시인들이 실감하는 삶의 무게와 헛헛함이 생생한 자리였다. 이날 팔순의 벗들은 너나들이하며 소년 소녀들처럼 들떠서 떠들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