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폭력… 복수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

연극 ‘고곤의 선물’
“사람들은 연극이 필요 없다고 하지.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이 그렇게 돌아선 거야. …그들은 지금 스크린과 TV 속에 홀딱 빠져 있어. 자신의 영혼이 강간당하고 굶어 죽어가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말이야. 상상력도 없는 일차원적인 어둠의 날개가 온 지상을 뒤덮고 있어. … 내 신념? 당연히 연극이지.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종교거든. 지금은 식어 버린 불덩이처럼 침묵 중이지만. …연극은 사람들에게 신념과 경이로움을 심어줬고, 사람들은 연극을 보며 자기 스스로 위대해지는 것을 느꼈어. 자기 내면의 섬광을 본거지.”

‘고곤의 선물’(피터 섀퍼 작, 구태환 연출·사진)은 연극이 과연 무엇인지, 왜 연극을 만들고 향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타성에 젖은 연극적 관점을 꾸짖고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는 작품이다. 한 극작가의 삶을 통해 진정한 연극의 의미와 연극이 이 시대에 외쳐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고민케 하는 반영극이다.

작품은 현재와 과거, 그리고 주인공 에드워드 담슨의 작품 세계와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파격적으로 넘나들면서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공간을 펼쳐 보인다. 주인공의 입을 통해 ‘연극은 죽었다’라고 외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작가는 이러한 그만의 독특하고 파괴적인 극작법을 통해 ‘연극은 죽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고곤’이 뜻하는 것은 영원히 사라져야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사의 폭력(테러)이다. 통상 메두사로 불리는 고곤은 그리스 신화 속 괴물로, 스테노·에우리알레·메두사 세 자매를 말한다. 이들은 놋쇠로 된 발톱과 커다란 뻐드렁니, 그리고 머리카락 대신 수많은 뱀을 머리에 얹고 있는 흉측한 모습이다. 원래 아름다운 처녀들이었으나 메두사가 아데나 여신의 신전에서 포세이돈과 사랑을 나누면서 신전을 더럽힌 이유로 신의 노여움을 사 괴물로 변한 것이다. 메두사는 죽음을 맞을 때 두 종류의 피를 흘린다. 하나는 치명적인 독약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의 치료약이다.

극의 중심에는 폭력과 비폭력 간의 논쟁이 있다. 테러 등의 폭력에 대한 대응 방법으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주장하는 극작가 에드워드와 포용과 용서의 비폭력적 방법을 주장하는 그의 아내 헬렌 사이의 논쟁이 바로 작품의 양 축이다. 악에 대한 폭력적 응징과 너그러운 용서, 어느 쪽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가를 이야기한다. 이는 고곤이 흘린 피, 치명적인 독약과 기적의 치료약에 비견된다.

극은 꽤나 산발적이고 복잡한 주제를 드러낸다. 담슨의 죽음을 따라가는 추리극으로서의 외연, 일상과 신화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페르세우스와 아데나의 장면 희곡 쓰기, 거기에 극중 담슨이 쓴 ‘우상들’과 ‘특권’, ‘아일랜드’라는 희곡까지. 연극은 완벽한 예술 추구에 대한 주제를 넘어 사회적 병리까지 끌어 안기에 다양한 층위를 읽어내야 하는 수학적 계산을 요한다.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종교가 연극’이며 ‘어둠을 밝히는 섬광이 연극’이라는 담슨의 신념에 찬 목소리는 그대로 작가의 목소리다. 작가는 극중 담슨의 희곡을 통해 연극이 평생 겨루어야할 주제를 제시하고, 연극을 위한 외로운 싸움을 해 온 담슨의 절망을 빌미로 그것을 종용한 대중들에게 항의하는 영특한 레토릭을 구사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단골 상연되는 ‘에쿠우스’나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아마데우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고곤의 선물’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그 깊이를 한 번 더 생각케 한다. 당시 일흔을 바라보던 쉐퍼가 더 날카롭고 충격적이며 신중히 써내려간 노년의 거작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 김소희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무대 위에 ‘절대 연기’를 풀어놓는다. 한없이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어느새 서글퍼지고 고통의 끝자락을 객석까지 그대로 전하는가 하면 행복에 겨운 얼굴로 응어리를 푼다. 변하는 감정에 따라 목소리의 톤도 걸맞게 달리한다.

10월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른다. 박상원·김태훈·김소희·김신기·이봉규·고인배 등 탄탄한 연기력의 중견들과 서울시극단이 협연해 완성도 높은 무대를 그려낸다. (02)889-3561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세계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