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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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뜨락] 옛사랑

이창기

우리는 종종 해안가로 밀려와 퍼덕이는 고래를 본다. 왜 고래들은 깊은 바다를 버리고 해안가로 밀려오는가?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이는 오 년 전 호주에서 보았고, 어떤 이는 지난해 충남 보령에서 만났다지만, 전철 입구나 지하 주차장에서 칠천삼백일 만에 느닷없이 마주친 이들도 드물지 않다. 고래와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어떤 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고래를 어루만지며 피부가 마르지 않게 부지런히 물을 뿌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젖은 눈을 들여다보며 초조하게 시계를 보거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도 하지만 이 고래를 되살릴 뚜렷한 방도는 현재로선 없다. 그저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예닐곱 시간을 기다려 고래를 다시 깊은 바다로 되돌려보내는 것 이외에는.

―신작시집 ‘착한 애인은 없다네’(창비)에서

◆ 이창기 시인 약력

▲1959년 서울 출생 ▲198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李生이 담 안을 엿보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