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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 '좌초'위기…재계 강력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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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규제 개혁한다며 '숨은 규제' 양산…금융권불만 터져
재계, 지난달 28일 금융위에 의견전달…총 9개항 삭제건의
모범규준案 관련 재계요구 받아들여질 경우 사실상 '좌절'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금융위원회에서 열린 금융발전심의회 정책·글로벌 분과 확대연석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회의 직후 금융위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전격 발표했다. 사진=금융위원회
제도 도입 초기부터 국회 입법권 침해 논란이 불거졌던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이 재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12년 6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사 지배구조법)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이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3년 가까이 계류 중에 있다. 연내 법안 통과가 사실상 물 건너가자 법을 대신한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이 지난달 20일 전격 발표됐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정부가 관련법이 통과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금융권 전체가 예외 없이 적용을 받는 통합지침부터 하달해 국회 입법권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 가운데 ▲최고경영자(CEO) 및 임원 추천을 위한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설치 의무화와 구성 요건·기능 신설(제14조) ▲CEO 경영승계 원칙 수립·운영 의무 부과(제30조~35조) ▲지배구조 연차보고서 작성 및 공시의무 부과(제54조) ▲2년 이상 재직한 사외이사에 대한 외부기관 평가 노력(제24조) 등 4가지 사항에 관한 총 9개 조항의 삭제를 재계가 금융위에 공식 요청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업권별 현실을 감안해 탄력적으로 금융권 일부에 대해서가 아닌 전(全) 업권에 걸쳐 일률적으로 운영된다는 데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법적인 강제력이 없는 자율협약으로 볼 여지가 있어 이를 꼭 따라야 할 의무가 금융권에 부여되는 것은 아니나, ‘관치 금융’이라는 한국 금융산업의 후진적 구태에 비춰볼 때 지키지 않을 강심장을 가진 금융사가 과연 몇이나 될 지 의문이다”고 꼬집었다.

지난달 28일 재계는 모범규준안(案)이 상위법에 근거가 없어 국회 입법권을 넘어서고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설치의무 부과 등 금융사 주주권마저 제약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시행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정부에 정식 제출했다.

홍성일 전국경제인연합회 금융조세팀장은 “규제혁파를 통한 ‘경제 활성화’가 중요한 시기에 법적 근거도 없는 과도한 규제를 양산하는 것은 금융산업 전반을 더욱 위축시킬 수 있다”고 금융위에 건의서를 낸 배경을 설명했다.

재계가 삭제를 요구한 이들 조항은 금융위가 지난달 공표한 지배구조 모범규준안의 핵심내용들로, 정부가 재계의 요청을 전부 받아들일 경우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시작되기도 전에 실효성을 잃게 돼 사실상 좌절되게 된다.

전경련은 “이번 모범규준에는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설치·운영 등 법적 근거 없이 금융사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규정들이 여럿 포함돼 있어, 국회 입법권과 기업활동 자유에 저촉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단체는 “국회에는 모범규준의 근거법이라 할 수 있는 ‘금융사 지배구조법 제정안’ 다수가 심사 중이다”며 “모범규준은 해당 법률이 제정된 이후 이에 근거해 법령의 세부이행을 위한 기술적 사항만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에는 지난 2012년 6월 정부안을 비롯해 같은 해 8월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 의원안과 그 다음 달인 9월 김기준 의원안, 지난해 4월 같은 당의 이종걸 의원안에 이어 6월 새누리당 김용태 의원안 등 금융사 지배구조 관련법안 5건이 올라있다.
지난달 28일 재계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안(案)’ 시행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정부에 정식 제출했다. 자료=전국경제인연합회
금융권이 가장 반발하고 있는 부분은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한 모범규준 14조이다.

우리 상법 제389조에 의하면 대표이사 선출은 이사회 권한이고, 회사 정관으로 정한 경우 주주총회에서 선임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범규준은 임원후보추천위원회가 대표이사 후보를 사전에 한정하도록 하고 있어 법률상 보장된 이사회 및 주총 권한을 축소할 수 있다.

특히 사외이사의 자격요건은 상법 등 현행법에 엄격히 규정돼 있는 까닭에 중복 규제에 해당한다는 것이 전경련의 입장이다. 또 재계는 정부의 규제개혁 방침에도 배치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모범규준은 본래 법적 구속력이 없는 자율규제 성격의 가이드라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구속력을 갖는 ‘숨은 규제’라는 것이다.

이재수 전경련 금융조세과장은 “금융감독원 검사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어 감독당국의 모범규준 제정 및 준수 권유는 금융기관에게 실제로는 구속력을 가진다”면서 “이번 모범규준은 실시 직후 대대적인 점검을 예고하는 등 규제준수를 강제하는 대표적 ‘숨은 규제’로써, 정부의 규제개혁을 통한 경제 활성화 방향에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금융사만 역(逆)차별하는 규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금융기관 이외의 다른 회사’는 대상에서 빠져 상법의 적용만 받는 반면, 금융사의 경우 법률상 근거 없는 의무를 지게 돼 제조업·서비스업 등 여타 산업에 속한 기업들과의 형평에 맞지 않게 상법은 물론 모범규준도 적용받는 불평등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금융사 내부사정을 잘 모르고 금융 전문성도 떨어지는 사외이사에게 CEO 추천권을 주는 행위 역시 특정집단의 세력화를 야기할 수 있다. 일부 은행·금융지주회사의 지배구조 실패를 금융권 전체로 인식, 전 금융권에 동일규제를 획일적으로 운용하는 점은 ‘과잉규제’라는 볼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법조계 고위관계자는 “‘모피아’로 대변되는 금융 관료집단이 현직에 있을 때에는 금융기관에 권력을 행사하고 은퇴 후에는 금융사 재취업을 통해 금권을 쥐는 기득권을 좀처럼 놓지 않으려는 것 같다”며 “금융산업이 아무리 규제산업이라고 해도 정부가 민간회사의 지배구조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건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고 평가했다.

법조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전 금융권을 규제하는 모범규준 발표행위 자체를 행정행위로 보고 이를 주주권 또는 경영권 침해를 이유로 한 행정소송을 법원에 제기함과 동시에 모범규준 발표행위 취소 혹은 무효확인을 구하는 가처분신청을 내는 방법을 통해 정부의 규제를 막을 수도 있겠으나, 소위 금융당국에 찍혀 인수합병(M&A)과 각종 인·허가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어 금융위를 상대로 제소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금융사 지배구조를 개선하고자 한다는 금융당국의 명분이 장기침체로 불황에 빠진 난국을 해결하고자 하는 경제 관련 민생법안보다 우선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국회에서 해당법안이 통과되지 않는다고 모범규준을 만들어 금융사를 옥죄는 일이 입법권과 법치주의를 무색케 할 만큼 한국사회에 시급한 문제인지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재계는 이번 주 금요일인 5일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의 쟁점과 평가’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전경련회관(FKI TOWER) 컨퍼런스센터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이 자리에는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과 김현종 전경련 기업정책연구실장, 조동근 명지대학교 교수, 민세진 동국대학교 교수, 강원 세종대학교 교수, 권재열 경희대학교 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

<세계파이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