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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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食口

“밥 먹었니?” 지구촌에서 한국인만 쓰는 인사말이다. 외국인들은 처음 이런 인사를 들으면 대개 고개를 갸우뚱한다. 통상적인 안부인사라고 설명해 주어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들처럼 Hi(안녕)라고 하면 되지, 매일 먹는 밥을 다른 사람에게 확인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굳이 밥을 매개로 말을 걸거나 대화할 필요성을 그들은 느끼지 못한다.

“식사하셨어요?” 이 말에는 한국인의 아픈 영혼이 담겨 있다. 옛날 보리가 익어가는 봄철 보릿고개 무렵이 되면 쌀독에 양식이 바닥나는 집들이 많았다. 굴뚝에 밥 짓는 연기가 사라지고 끼니를 굶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 시절 밥을 먹었는지 묻는 행위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별일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느냐는 관심의 표현이었다. 생명에 대한 안부이자 타인을 향한 배려였다. 공감이고 사랑이었다. 어느 조사에서 서양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로 “밥 먹었니?”를 꼽은 것도 아마 이런 까닭에서가 아닐까.

한국인에게 밥은 가족을 묶는 단단한 접착제다. 가족의 끈끈함은 밥을 제외하면 성립될 수 없다.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같이 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바로 가족이다. 식구라는 단어는 의미가 점차 넓어져 ‘한 조직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 식구가 되었다고 하면 가족처럼 공동운명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영어권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뜻하는 company는 com(같이)과 pan(빵)의 합성어다. ‘빵을 같이 나눠 먹는 관계’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치자면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다. 밥이 공동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요즘엔 밥의 정감과 위력이 자꾸 빛을 잃는 느낌이다. 2013년 국민건강통계에 따르면 가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이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가족 동반 아침식사 비율은 2005년 62.9%에서 2013년 46.1%로 내려앉았다. 학교나 직장에 많이 나가 있는 점심의 경우 14.4%로 뚝 떨어졌고, 저녁은 65.1%로 나타났다. 함께 식사하는 비율은 젊은 층일수록 더 낮았다.

새해 들어 가족을 해체하는 끔직한 범죄가 연일 가슴을 친다. 남을 헤아리는 배려와 공감의 인사말이 사라진 세태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밥 먹었니?” “식사하셨어요?” 망각의 언어를 마음속 상자에서 잠시 꺼내 본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