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주 대표가 다양한 원단 중 고객에게 가장 적합한 원단을 선택하고 있다. 그는 1916년 부터 시작한 ‘종로 양복점’을 3대째 이어가고 있다.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죠? 그 인연을 만들기 위해 5000개가 넘는 바늘땀과 80시간 이상의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이 생긴 거 같아요.”
창업 100주년을 맞은 ‘종로양복점’ 테일러 이경주(66) 대표의 첫 마디다.
|
이 대표가 고객의 체형 특성을 고려해 신체치수를 측정하고 있다. |
|
가봉을 마친 뒤 밝은 표정을 짓는 이 대표. |
3대째 맥을 이어오고 있는 종로양복점은 1916년 이 대표의 할아버지 이두용씨가 종로1가 보신각 근처에 문을 연 게 시작이었다. 아버지 이해주씨에 이어 지금은 중구 저동에서 명맥을 지켜 나가고 있다.
|
종로양복점 창업주 이두용씨, 2대 이해주씨의 사진이 걸려 있다. |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은 한때 공장 직원만 100명이 넘을 정도로 호시절을 누렸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부터 맞춤 옷 대신 기성복을 즐겨입는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고, 지금은 단골손님을 제외하곤 양복점을 찾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종로1가에서 동대문까지 수십 군데에 이르던 대로변 양복점들은 지하로, 빌딩 안으로 숨어 버렸다. 천하의 종로양복점이 중구의 한 빌딩 6층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
가봉(시침질)을 하고 있는 이 대표의 손길이 섬세하다. |
이 대표는 1969년부터 양복 재단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청계 5가에 있는 복장학원에서 재단용 자를 보는 방법부터 배우기 시작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아버지에게 혹독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엔 양복을 맞춘 손님들 열 명 중 서너 명이 사이즈가 안 맞는다며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줄기에 땀이 맺힌다는 이 대표는 반세기 시간이 흐른 지금은 손님의 몸만 봐도 치수가 보인다고 한다.
|
이경주 대표가 종로양복점 창업 연도가 적힌 로고를 붙이고 있다. |
호황을 누렸던 시절에 비해 지금은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는 7평 남짓한 양복점이지만 3대가 변함없이 지켜온 맞춤 양복에 대한 고집 덕분일까? 종로양복점은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발간한 ‘근현대 직업인 생애사’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옷본을 뜬후 50년 된 가위로 능숙하게 재단을 하고 있다. |
“맞춤복은 주인이 따로 없는 기성복과 달리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옷을 입는 사람에 대한 배려로 만들어집니다. 손님이 흐뭇해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음이 바빠지죠. 그래서 전 오늘도 50년 된 재단 가위를 놓지 못합니다.”
두 자녀를 둔 이 대표가 한쪽 벽에 걸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입지가 좁아진 맞춤양복 시장 탓에 아직 가업을 물려주지 못했네요….”
|
원단 장식장 한편에 할아버지 때부터 쓰이던 줄자 (사진①), 옷걸이 (②), 무쇠다리미 (③), 다리미판 (④)이 놓여 있다. |
그를 마지막으로 종로양복점은 없어질지 모른다. 3대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종로양복점이 이렇게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가.
사진·글=이재문 기자 m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