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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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칼럼]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듯이

성 전 회장 증언 너머로 펼쳐지는 음습한 돈정치
성역 없는 수사 의지, 일점일획도 바꾸면 안돼
배신감에 절망해 목숨까지 던진 기업인의 복수극이 서서히 절정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MB맨이 아닙니다”라고 목놓아 외쳤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친박 실세들만 콕 찍어 세상에 알렸다. 북한산에 오르며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다짐받듯 “녹음해달라” “꼭 보도해달라” 하던 신신당부는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상상력을 한층 자극하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정치인들에게 돈을 뿌렸다는 통화 녹취록과 메모가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드라마 결말의 대본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성 전 회장이 정·관계 인사 100명에게 150억원 돈을 건넸다는 스포일러는 오히려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시작하자마자 청와대 비서실장 1·2·3호와 총리를 비롯한 여권 실력자들이 도매금으로 의혹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 자체만으로도 흥행은 따놓은 당상이다. 

김기홍 논설실장
당사자들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황당무계한 허위 사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1원이라도 받았다면 정계은퇴” 등등의 결백을 호소하느라 숨이 가쁘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절하지 않은 돈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싶다. 그럴 분들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세상의 시선은 살아있는 자들의 입보다 죽은 자의 목소리와 급히 휘갈겨 쓴 55자(字) 쪽지에 꽂혀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거짓말을 했겠느냐”면서. 사람은 죽을 때에 가장 솔직해지고 진실하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까지 거짓으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드물다. 말기암 환자들이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를 담았다는 책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 그중에는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내가 살아온 증거를 남겨두었더라면’이라는 목록이 있다. 성 전 회장이 녹취록을 남기고 메모를 웃옷에 넣어 둔 것이 그가 죽음을 앞두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이었고 자신이 살아온 증거를 남겨두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누구처럼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실컷 욕을 하고 싶을 수도 있었겠다.

성 전 회장의 의도가 무엇이든 “기업하는 사람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면 무시할 수 없어 많이 했다”는 목소리 너머로 익히 보고 또 봤던 돈정치가 펼쳐진다. ‘대선자금 장부에 회계처리가 된 돈이냐’는 물음에 단박에 “뭘 처리해요” 하는 대꾸에선 음습한 불법정치자금의 관행이 오버랩된다.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사람들’로 일컬어진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1997년 4월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한보청문회 때 그 안에 갇혀 있는 수많은 정치인과 기업인을 보고 한 말이었다고 한다. 교도소 담장 안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잠시도 한눈팔지 말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김 전 지사는 지금도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으로 정치를 한다는데 어찌 그만이 가슴에 품고 있을 자계(自戒)이겠는가. ‘성완종 리스트’의 8명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다가 발을 잘못 디뎌 담장 안쪽으로 매달려 있는 처지가 됐다.

금품사건의 대부분은 돈을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이 없다. 그걸 핑계로 어물쩍 덮어놓고 넘어가는 짓을 수없이 되풀이하다 제 발등을 찍고 또 찍은 것이 정치의 흑역사다. 성완종씨가 세상을 등지며 남긴 숙제는 불편하지만 풀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시늉을 내는 데 그치면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리스트 인사들이 검찰 조사를 당당히 받겠다고 했다.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렸고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이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엄정히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그 원칙과 의지가 일점일획도 바뀌지만 않으면 된다. 여기에 사족 하나 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냉장고 문을 닫는 간단한 방법은 죽었다 깨어나도 터득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렸다.

김기홍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