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국무총리는 박근혜 대통령 부재 첫날인 17일 오전 8시50분쯤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했다. ‘성완종 리스트’ 연루 의혹으로 나흘 동안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시달릴 대로 시달린 탓인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이 총리는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이 계실 때보다 더 열심히 국정을 챙기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어제 출국했으니 총리로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빈틈없이 국정을 통할할 책무를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의 거취에 대해 “순방 후 결정하겠다”며 가능성을 열어둔 박 대통령의 발언에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다. 그는 총리로서 검찰 수사를 보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총리는 검찰 수사를 지휘할 수 없고 수사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도 못하며 알아서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
|
국무총리(오른쪽)가 1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이 총리는 출근길에 기자들에게 “대통령이 계실 때보다 더 열심히 국정을 챙기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
이 총리는 이어 청사에서 예정에 없던 간부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순방기간 현안을 철저히 점검해 달라. 각 부처별로 진행되는 안전진단을 철저히 해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회의는 5분 만에 끝났다. 이 총리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내내 사무실에 머물렀다. 칩거에 가까운 모양새다. 이 총리는 일부 간부와 대책을 협의하고 충청 민심 향배를 예의주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는 중남미 순방을 떠난 박 대통령이 귀국하는 27일까지 내치를 대행하게 된다. 그렇다고 대통령 권한대행은 아니다. 총리로서 기존 업무를 유지한다는 게 중론이다. 해외순방 중에도 대통령의 통치행위는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 부재 시 총리 역할은 대통령을 대신해 국정을 총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셈이다. 하지만 ‘시한부 총리’가 될 수 있는 그로서는 ‘내치 대행’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할 의지가 생길 수 있다. 앞으로 딱 열흘간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퇴론이 확산되는 여당 분위기와 여론의 향배, 검찰 수사가 관건으로 꼽힌다.
|
이완구 국무총리가 17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입을 꾹 다문 표정을 지으며 퇴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전날 박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이 총리 사퇴를 요구하는 당내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로선 국회 인준 과정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 당마저 등을 돌린 격이다. 당내 ‘반이완구’ 기류를 누그러뜨려야 그나마 ‘버티기’를 할 여지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양측 접촉은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점이 부담이다. 이 총리도 이날 기자들에게 “당 쪽하고는 말하지 않는 게 예의 같다”며 “당 쪽에는 가급적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
이완구 국무총리가 15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의원 질의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다가 피곤한 듯 얼굴을 만지고 있다. 이재문 기자 |
무엇보다 검찰 수사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해소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그래야 악화된 여론을 돌리는 반전 카드를 마련할 수 있다. “다녀와서 결정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언급은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는 결과와 여론을 보고 결단을 내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재로선 이 총리에게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는 형국이다. 검찰 수사에서 이 총리 의혹을 뒷받침할 물증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국정 2인자’로서의 권위와 신뢰성에 너무 많은 상처가 났다.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과정에서 의혹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확산됐고 추가 의혹도 제기되는 터다. 이 총리 외곽조직을 이끄는 충남 아산의 한 시내버스 회사 대표가 구속된 것도 이 총리에게 악재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