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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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 장악한 조선사편수회… 식민사학 세 불렸다

[광복 70년, 배워야 할 한국사] 〈5〉지금도 살아있는 일제식민사학
반세기 가까운 일제 강점기의 민족 말살 식민지 교육과 국토를 황폐화하고 국민 삶을 극한의 상태로 몰아갔던 6·25전쟁을 겪고도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만들어냈다. 21세기에는 아시아의 변방국가에서 세계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되었고, 문화예술과 새마을운동까지 ‘한류’를 통해 세계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가능성을 가진 민족’임을 현실로 증명했다. 그러나 우리의 저력과 가능성을 말살하려고 만든 식민사학 틀에서는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근래 일본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 침략이 강화되고 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그들의 잘못을 소리 높여 외칠 뿐이다. 한편에서는 애써 바로잡았던 왜곡된 역사가 되살아나는 분위기도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사대·식민사학의 현상을 똑바로 보면 제대로 된 극복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서울 종로에서 벌어졌던 ‘3·1운동’ 모습. 국권을 되찾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였던 ‘겨레싸움’이라는 점에서 국가 내부집단 간의 갈등을 지칭하는 ‘운동’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견해가 있다.
◆민족의 저력은 고대사에서 시작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명예장관’으로 지목했던 이홍범 박사는 저서 ‘아시아 이상주의’에서 국제정치역학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문명 정신’이라고 강조하면서 한국 역사를 언급했다.

“많은 세계인들은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영향으로 ‘한국인은 미개해서 고대에는 중국의 속국으로 근대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는 일반적인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과 중국을 만든 민족은 바로 한국인이며, 고대 한국 문명이 아시아 문명의 모체가 됐다.”

문성철 한국전통사상연구원장은 1960년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 서울대 박종홍 교수의 일화를 소개했다. 하이데거는 박 교수에게 “내가 동양사상을 연구하다가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는 한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평화적 정치로 대륙을 통치한 조선’이 있었음도 알았다. 나는 동양사상의 종주국인 한국인을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대조선은 이처럼 우리의 뿌리이자 우리가 먼 옛날 이룩했던 우수한 문명의 집합체다. 또 미래의 꿈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고대조선에 뿌리를 둔 독자적인 문화는 고려 때까지도 유지됐다.

하지만 ‘사대주의’를 표방한 조선이 건국되면서 분위기는 바뀌었다.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이 두드러진 고대조선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고, 중국에서 온 기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고대조선의 역사를 전하는 사서(史書)를 민간에서 갖지 못하도록 거두어들이는 조치도 있었다. 일제에 의해 왜곡이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는 먼 옛날의 일이고, 힘없던 시절의 한계였지 않으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어설픈 자위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광복 후에도 식민사학은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제현 신사비(위 사진)와 봉니는 일제가 북한 평양지역에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이 있었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하지만 식민사학의 정립을 위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식민사학, 조선총독부의 정치논리에서 비롯하다


조선총독부는 식민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료는 무시하고 필요한 소수 사료만 선택해서 사용했다. ‘식민사학은 학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정치논리’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면서도 학문으로 위장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실증사학’이었다.

광복 후에도 일제의 한국사 왜곡 작업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의해 식민사학의 방법과 내용들은 이어졌다. 그 틀 안에서 학맥이 형성됐고, 스승들의 논리와 다른 내용을 전하는 역사연구는 배격됐다.

주류사학계의 계보에 대해 이희진은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에서 “고대사 학계의 식민사학 문제는 식민사학 자체의 논리보다 학계의 구조적 비리와 훨씬 더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런 사정이 아이로니컬하게도 대한민국에 침투해 있는 식민사학의 잔재를 체계적으로 추적해서 청산하기 어려워진 이유가 되어왔다”고 지적했다.


클릭하면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병도의 한사군 지도(왼쪽)과 동북아역사재단이 해외 보급을 위해 출간한 책에 실은 한사군 지도(가운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사군이 지금의 북한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한 점에서 비슷하다. 반면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 등은 한사군의 위치를 현재의 중국 동북부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사, 중국·일본의 식민지배에서 시작했다(?)”

어떤 내용이 문제일까.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고, 광복 후에는 역사학계를 장악한 이병도와 신석호의 주장과 학맥을 짚어보면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이병도는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후 조선사편수회 수사관인 이마니시 류(今西龍) 밑에서 통일신라 이전, 통일신라, 고려 시대까지의 고대사 수사관보와 촉탁을 맡았다. 그는 와세다대학의 스승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에게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성은 한(韓)씨로 알려진 기자(箕子)의 후손인 준왕이 고대조선을 위만에 뺏기고 남쪽으로 와서 한왕(韓王)이 됨으로써 ‘삼한’(三韓)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한반도 북부는 고대조선을 위만조선, 한사군이 식민지배했다는 ‘고대조선-기자(한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의 법통을 만들었다. 남부는 기존의 진(辰)이 준왕에게 장악되어 ‘삼한’(三韓)이 되었다고 보았다. 한반도는 모두 중국의 식민지배를 통해 앞선 중국의 문화, 특히 금속기 문명의 영향을 넉넉히 받아 발전한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이병도가 서울대 교수, 문교부 장관, 학술원장 등을 지내며 학계에서 구축한 위상은 막강했다. 후배 학자들 중 누구도 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을 받아 학계가 고대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제작하면서 참고한 절반 이상의 자료가 이병도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지금껏 이어지는 영향력을 증명한다.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며 조선시대 전기를 정리하는 촉탁, 수사관보, 수사관을 지냈다. 광복된 해인 1945년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신인 국사관을 창설했다. 국사찾기협의회의 김정권 회장은 이를 두고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가 간판만 바꿔 달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임시 중등교사양성소를 개설해 교사를 양성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학계에 식민사학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유라고 본다.

◆배타적인 학계, 식민사학 극복을 가로막는다

일제 학자들은 자기네 입맛에 맞는 1차 사료가 부족하자, 1914년 ‘평남 용강에서 낙랑군 점제현감의 비문(점제현 신사비)이 발견되었다’, ‘평양 토성리에서 낙랑의 봉니(封泥: 공문서를 봉하고 도장을 찍은 점토덩어리)가 나왔다’는 것을 들어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두 유물은 남북한 학자들에 의해 ‘일제가 조작한 유물을 미리 묻어놓고 옛날 것을 발견한 것처럼 발표한 날조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는 이렇게 유물을 날조하면서까지 한민족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시켰고,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우리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타율성론을 만들었다.

이런 주장은 1960년대 이후 남북한에서 반박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리지린을 비롯하여 남한의 윤내현, 김종서, 심백강 등이 중국 사서를 근거로 한사군이 평양이 아닌 중국 허베이성 지역에 있었고, 패수도 허베이성의 다링허 등이라고 밝혀냈다. 이런 주장에 힘이 실리면서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표시한 지도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이론을 따르는 주류 학계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고, 시민단체의 공개토론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 이는 자기들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류 학계에서 스승과 선배의 학설에 대한 엄격한 학문적 비판은 금기시되고 있다. 그것을 ‘선생, 선배에 대한 예의’인 것처럼 말한다. 기존의 학설에 배치되는 사료는 거론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에 맞는 소수 사료만을 내세워 실증사학이라고 한다. 또 자기네들끼리 연구 결과를 교차로 인용하며 정당화하고 있다. 나아가 역사 연구와 교육, 교과서 편찬 등을 담당하는 기관을 장악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여러 경로에서 식민사학의 흔적이 드러난다. 교과서가 대표적이다. 고대조선의 역사를 만들어진 이야기인 양 취급하는 ‘단군신화’라는 말이 사라졌다가 2009년 이후 다시 살아났고, 고조선의 세력 범위에서 남한지역을 제외시켰다. 우리 고대사의 한 주역인 가야를 배제한 채 ‘삼국시대’라 하고, ‘고구려 유민의 부흥 운동은 대조영의 발해 건국으로 그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서술하면서도 발해의 존재를 무시한 ‘통일신라시대’ ‘후삼국통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당나라와 몽골, 심지어 북한과는 ‘전쟁’을 했다고 하면서 뺏긴 나라를 찾고자 일본을 상대로 싸운 ‘겨레싸움’은 3·1운동, 의병운동 등은 ‘운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쟁’이란 국가와 국가 간의 무력충돌이지만, ‘운동’이라고 하면 한 국가 내부집단 간의 갈등이라는 의미가 강하므로 민족 항쟁이라는 의미가 축소되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2년 발행한 ‘한국사1 총설’에서 한국사 영역의 자연환경을 소개하면서 ‘한반도 지역’의 지형과 기후 등만 서술하고 있는 것도 고대로부터 우리 역사를 한반도 내부로만 한정시키려는 ‘반도사관’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 복원, 민족 자긍심 회복의 전제다

지금의 교과서, 역사 관련 기관이 편찬한 책에는 우리 역사를 스스로 위축시키고 심지어 폄훼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을 만한 내용이 담겨 있고, 그것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지금 정부가 역사교육을 강화하겠다고 하지만, 역사가 제대로 복원되지 않고는 허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식민사학의 극복을 위해서는 국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토론회를 벌여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민족임을 깨닫고, 자긍심을 제대로 되살릴 수 있는 역사로 복원되어야 한다. 제도권 학자들이 공개토론회에 응하지 않는 것은 학자로서의 직무유기다. 나아가 통일 후 중국, 일본과의 관계에 미칠 파장을 감안하여 북한과의 공동연구 등 협력을 강화하여 동질성을 강화하는 방안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박정학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