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강제추행 혐의로 피고인석에 서게 된 청각장애인 A씨를 돕기 위해 법원에 온 김민경(34·여)씨는 판사가 말한 ‘영장’ 이라는 단어를 듣고 난감해졌다. 법정 수화(手話) 통역을 맡은 김씨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A씨에게 ‘영장’이라는 단어를 설명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먼저 손바닥 하나를 하늘 쪽을 향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 위에 주먹 쥔 다른 손을 올려놓았다. 마치 TV드라마나 영화에서 경찰이 영장을 제시하듯 위쪽 주먹을 들어올렸다 앞으로 내밀었다. A씨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화를 시작했다.
20일 법정 수화통역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민경씨가 법정에서 자주 쓰는 표현을 수화로 보여주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
2008년부터 서울중앙지법 법정 수화통역인으로 활동 중인 김씨는 어려운 말이 오가는 엄숙한 법정에서 청각장애인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소리’이다. 그는 형·민사재판의 당사자가 된 청각장애인에게 재판 진행과정을 설명해주고, 법정에서의 소통을 돕는 역할을 한다.
일반인에게도 어려운 법률용어를 청각장애인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청각장애인 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김씨는 강조했다.
“가끔 청각 장애인들이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무섭죠? 표정도 일그러뜨리고, 얼굴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잖아요. 이런 것을 ‘비수지 기호’라고 해요. 손이 아닌 다른 동작을 첨가해 ‘뉘앙스’를 전달하는 거죠. 잘 살펴보면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강요에 의해 진술했다’ 같은 내용도 캐치해서 재판부에 전달할 수 있어요.”
어린 시절 야구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청각장애 아동을 보고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김씨는 “청각장애인이 뭘 답답해하고,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많이 고민했다”며 “수사·재판과정에서 손해를 보는 청각장애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법정 수화통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중앙지법에 등록된 통·번역인은 200여명 정도다. 이 중 김씨와 같은 수화 통역인은 10명 남짓이다. 김씨는 통·번역인과 함께 매년 한 차례씩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재판 절차 진행, 증인신문 과정, 법정용어, 재판 종류 등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김씨는 20일 “통역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재판에서 알게 된 것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것”이라며 “이 분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물론 ‘협조’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