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가족이 제 노릇을 못하고 있으니 그에 따라 효도의 의미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면 ‘가정교육이 없어서 그렇다’거나 ‘인성이 나빠서 그렇다’고 말하며 효도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하지만 현대의 삶의 조건이 과거의 그것과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데도 ‘무조건 효도를 하면 좋아진다’라는 말은 너무나도 낭만적인 주장으로 들린다. 지킬 수도 없는 효도를 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효도를 불편하게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을 치렀다. 사대부가 3년 상을 치르지 않으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등 사회적 제재를 받았다. 과거에 부모에 대해 3년 상을 치렀다고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그 효도는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불편한 효도가 될 뿐이다. 어느 사람이 3년 상을 치른다고 직장에서 휴직하겠다고 하면 휴직을 승인하고 3년 뒤에 복직 처리를 해줄까. 그런 직장은 없을 것이다. 또 저녁에 부모의 잠자리를 봐드리고 아침에 문안 인사를 하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이 효도의 기본이었다. 오늘날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지 않은 경우가 많고, 함께 살더라도 생활 주기가 서로 다르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혼정신성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퇴근하고 부모가 계신 곳을 찾아가야 하고 야근하고 들어온 자녀를 깨워야 한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 |
오늘날 가족 구성원이 각자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공동의 기억을 갖추기가 어렵다. 아울러 현대사회는 지구화가 심화되면서 삶의 조건이 급격하게 바뀌고 테러와 범죄 등으로 삶의 위기가 증대되고 있다. 현대인은 서로에게 연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짧은 시간’만이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났는지 걱정을 하게 된다. 심지어 가족의 활동 지역에 무슨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는 보도가 났을 때 연락이 되지 않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러한 삶의 조건을 고려하면 오늘날의 효도는 자주 연락해 서로 걱정하지 않게 하고 저녁에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일상의 회복, 즉 안부(安否)의 확인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안부는 ‘편안한지’에서부터 ‘살았는지’ 여부를 묻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