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되지 않는 불안과 공포-영화 창작과정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란 부제를 단 ‘봉준호 감독 마스터클래스’에서 봉 감독이 직접 털어놓은 속내다. 천재적인 감각과 구성력, 기교와 뚝심을 두루 갖추고 ‘한국 영화의 오늘’을 끌어가는 그도 창작의 고통에선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가 보다. 18일 오후 7시 서울 압구정CGV 아트하우스에서 열린 클래스는 3시간 10분 동안 한 차례도 쉬는 시간 없이 ‘롱테이크’로 진행됐다. 봉 감독은 ‘괴물’ ‘마더’ ‘설국열차’ 세 작품에 얽힌 연출의도를 구체적 사례에 녹여냈다.
“이처럼 공포가 밀려드는 것은 ‘집착’ 탓입니다. 집착하는 그 무엇이 해결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될까봐 미리 겁부터 내는 거죠. 2005년 설국열차 원본 만화를 봤을 때 영화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게 집착이 되어 10년 가까이 제 가슴과 머릿속에서 마치 암덩어리처럼 존재한 거예요. 영화를 완성하고 상영한 뒤, DVD나 블루레이를 장식장에 꽂을 때에야 비로소 암덩어리(집착)를 끄집어 낼 수 있었어요.”
‘잘나간다’는 봉준호 감독도 영화를 찍을 때면 불안과 공포를 크게 느낀단다. 사진은 지난 18일 서울 압구정 CGV 아트하우스에서 열린 ‘봉준호 감독 마스터클래스’ 모습. CGV 아트하우스 제공 |
영화 '괴물' |
그랬다.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손톱밑 때를 파던 아가씨는 괴물에 깔린 채 한참을 끌려다니게 되고, 괴물의 등장을 목격한 순간에도 강두(송강호)는 오징어 다리가 열 개라고 손님에게 항변하고 있으며, 발로 찬 맥주 캔이 저만큼 나가떨어진 채 액체를 내뿜는 모습을 지켜보던 현서(고아성)는 괴물의 꼬리에 감겨 끌려가고 만다. 난동 부리는 괴물을 차창 밖으로 지켜보고 있는 버스 안 승객들은 흘러나오는 ‘57분 교통정보’를 평소처럼 듣고 있다. 아비규환의 무질서 속에서도 봉 감독이 치밀하게 계산한 장면들은 이처럼 자기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촬영할 때는 현장에 괴물이 없었기 때문에 동선을 세밀하게 짰어요. 괴물 대역의 달리는 오토바이에 맞춰 배우와 엑스트라들이 자신의 동선을 지키면서 각각 주어진 연기를 펼쳤습니다. 한강에 놀러왔던 시민들이 이를 지켜볼 때 얼마나 이상했을지, 특히 주연배우 송강호가 혼자 미친 듯 이리저리 뛰거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상대로 싸우는 모습은 퍽이나 우스웠을 테죠.”
괴물은 물론 괴물에 차여 강으로 날아간 사람, 몸에서 나는 먼지 등은 모두 CG(컴퓨터그래픽)로 처리한 것들이다.
영화 '마더' |
“제가 어릴 때 관광버스 안에서 춤추고 놀던 아주머니들을 본 기억을 떠올려 영화의 끝부분에 사용했습니다. 태양빛이 옆에서 수평으로 버스 안을 비치도록 1월 7일을 잡아 찍었어요. 버스 안 뒤쪽에 앉아 있던 엄마(김혜자)가 일어나 아주머니들이 춤추고 있는 무리 사이로 들어가는 모습을 버스 바깥에서 또 다른 버스를 타고 따라가며 망원렌즈로 촬영해 실루엣을 담았습니다. 모니터를 보니 역광 속에서 엄마의 춤추는 동작이 마치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지은 일들을 모두 햇님에 맡기겠다는 엄마의 심정이 담긴 것 같아 이 장면을 지금도 좋아합니다.”
봉 감독은 촬영하던 인천공항 주변 매립지에 마음속 종양덩어리를 빼내 툭 던지고 오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영화 '설국열차' |
“좁고 긴 공간 안에서 손도끼나 창에 의해 유혈이 낭자한 전투신을 그린 영화가 거의 없어 꼭 찍어야겠다고 벼르던 작품입니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마치 복도 같은 곳에서 2시간 내내 풀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시작했어요. 결국 빛과 어둠을 활용키로 했죠. 긴 터널을 통과할 때 생기는 어둠과 횃불의 밝음을 전투에 적용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성냥을 그은 소년에 이어 웃통을 벗은 성인이 횃불을 이어받아 차량 속 길게 난 공간을 달리는 장면에서 원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이를 전투까지 연결 지은 것입니다. 갖은 역경을 거쳐 마지막 엔진 칸에 도달하는 전개라서, 원작의 26개 기차 칸을 고수했어요. 한 칸이 설령 휙휙 지나간다 하더라도 아예 빼버리는 것보다는 영화를 풍족하게 만들어 줄 역할을 해낼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봉 감독은 즐겨 찾는 카페 몇 군데를 돌며 적당한 소음 속에서 시나리오를 쓴다. 늘 대여섯 작품을 구상 중인데, 패륜아들이 떼지어 나온다거나 공공장소에서 사람이 많을수록 더 무서워지는 독특한 공포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잘못된 신앙을 다루는 작품의 경우 이미 큰 건물이 불타는 장면까지 구체적으로 떠올린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차기작 ‘옥자’에 몰입 중이다.
“구로자와 아키라나 스탠리 큐브릭 등 거장 감독들도 자신을 학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영화는 혼자 보기 위해서 찍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것이므로 그저 묵묵히 견디며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야만 합니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