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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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환경도 살리는 '적정기술'

입력 : 2015-05-27 20:04:20
수정 : 2015-06-25 17: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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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지구 지키는 창조의 길] ⑥ 사업장 환경개선의 모범 영국 웨일스…인간·환경 중심형 적정기술로 오염물질 차단 극대화
오염된 식수에 빨대처럼 꽂으면 바로 마실 수 있게 필터로 걸러주는 ‘라이프스트로’는 대표적인 ‘적정기술’이다.
아프리카 등지의 오염된 식수에 빨대처럼 꽂으면 바로 마실 수 있게 필터로 걸러주는 라이프스트로(LifeStraw)는 대표적인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다. 물을 길어오기 위해 먼 길을 오가야 하는 어려움을 덜어주는 굴리는 물통 ‘큐드럼’이나 태양열을 머금어 빛을 발산하는 ‘페트병 전구’도 마찬가지다.

적정기술이란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의 기술보다는 우수하지만 선진국의 기술보다는 저렴해 실제 활용도가 높은 기술을 말한다. 영국의 경제학자인 에른스트 슈마허가 1965년 주장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수록된 중간기술은 개도국에 막대한 기술 원조를 했음에도 왜 발전이 부진한가에 대한 원인 규명 과정에서 나온 이론이다. 개도국의 자연적·문화적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지원이 효율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반성이었다.

이후 선진국에도 첨단기술의 한계를 벗어난 ‘대안기술’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영국 웨일스에 1973년 설립된 대안기술센터(Center for Alternative·CAT)는 이런 목적에서 설립된 곳이다. CAT는 지속가능하고 환경적으로 건강한 기술을 찾아 보급하는 역할을 한다. 적정·중간·대안기술 모두 기술이 사용될 여건을 고려한 인간과 환경 중심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환경분야는 적정기술이 필요한 대표적인 영역이다. 환경보호가 개발의 뒷전에 밀리기 일쑤인 상황에서 환경에 대한 지나치게 복잡하고 높은 수준의 요구는 오히려 ‘포기’를 유발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경제적·기술적으로 적용 가능한 기술이야말로 환경 오염을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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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 영국 웨일스의 주도 카디프에 들어선 폐기물 재활용업체인 비리도르(Viridor)사의 쓰레기소각장은 소각업종에 관련된 BAT(최적가용기법·Best Available Techniques)를 모두 적용해 건설했다.

◆최적가용기법 활용에 적극적인 영국

1970년대 CAT가 설립된 후 적정기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영국 웨일스를 지난 11일 찾았다. 웨일스의 주도인 카디프시에서 만난 웨일스 환경청 NRW(Natural Resources Wales)의 직원들은 일종의 적정기술인 최적가용기법(Best Available Techniques·BAT)을 업계에 적용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BAT란 기술적·경제적으로 적용 가능하면서도 오염물질 배출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환경기술을 말한다.

유럽연합(EU)은 2010년 산업배출지침(IED)을 제정하면서 각 회원국에 BAT의 개발 및 적용을 의무화했다. 각 기업이 현장에서 사용 중인 기술은 무엇인지, 오염배출 현황은 어떻게 되는지, 자원과 에너지 소비수준은 어떤지, 신기술에는 무엇이 있는지 등을 담은 BAT 기준서도 만들어 기업에 보급하고 있다. 기업이 속한 업종별로 70∼100개 정도 적혀 있는 BAT 중에서 사업장 여건에 따라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로 기술을 적용하게 함으로써 환경관리를 최적화한다는 게 기준서를 보급하는 이유다. 기준서를 일정 기간 뒤 업데이트할 때는 기술의 진보에 따라 BAT의 수준이 높아지고 이에 따라 배출기준 역시 차츰 강화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기준서를 만들고 의무 적용하는 과정은 철저히 기술을 실제 사용할 산업계와의 대화를 통해 이뤄진다. NRW의 앤드류 깁스 원자력·산업규제부장은 “기술작업반을 구성해 기준서를 만드는 과정에 업체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한다”면서 “이후 의무시행까지 주는 4년의 유예기간 동안 업체가 기준에 맞춰가고 있는지 계속 확인한다”고 말했다. 매리 운영본부장은 “기업과 규제자 간에 신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쓰레기소각장을 건설하는 데 주민 반대가 심했지만 BAT를 전면 적용한 시설이라는 점이 주민 설득에 도움이 됐다. 비리도르 제공
◆적정 환경기술 활용되는 현장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철강회사인 인도기업 타타스틸은 95개의 철강업종 BAT 중 타타스틸에 적용가능한 72개 중 55개를 이미 적용했다. 유예기간이 끝나는 2016년까지 적용을 완료해야 한다.

타타스틸의 제이슨 환경담당부장은 “만약 BAT가 비용대비 환경개선 효과가 작을 경우 진정서를 제출하거나 다른 기법을 제시하기도 한다”면서 “기존의 설비나 기술을 BAT에 맞춰 바꿀 때 추가 비용이 들어가거나 공정을 일정 기간 닫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후 원료비가 줄어드는 등 효율성의 측면에서 장점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기준서가 항상 현장의 상황을 잘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불평하면서도 “기술을 상의하는 NRW 담당자의 수준은 충분히 높아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올 1월 카디프에 들어선 폐기물 재활용업체인 비리도르(Viridor)사의 쓰레기소각장은 소각업종에 관련된 BAT를 모두 적용해 건설한 곳이다. 이 시설에서는 웨일스 지역의 생활쓰레기를 소각해 발생한 열로 전기를 생산, 연간 5만가구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소각장 안에는 생활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여느 시설에 비해 악취가 심하지 않았다. 이 회사의 관계자는 “1990년대부터 소각장을 지으려고 했지만 주민 반대가 심했다”면서 “다른 지역을 견학시키면서 BAT에 대해 설명하는 등 BAT를 전면 적용한 시설이라는 부분이 주민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2013년 BAT를 의무화한 IED를 도입한 웨일스는 2018년까지 모든 업종으로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카디프(영국)=윤지희 기자 phh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