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문화산책] 어른의 시간

나이 들면 ‘인간’에 대한 이해 달라져
‘빨강머리 앤’만큼 마릴다도 좋아져
최근 ‘빨강머리 앤’을 보다가 불현듯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앤을 사랑하지만 지금은 앤만큼이나 마릴다 아줌마 역시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어릴 적엔 마릴다가 그렇게 야박해 보이고 밉더니, 이제 아줌마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앤처럼 실수투성이에 말 많고 감정적인 아이를 키우는 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이를 한 번도 키워 보지 않은 나이 든 마릴다가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앤은 ‘주의력 결핍과잉 행동장애(ADHA)’ 진단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아이다.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표현하는 방법이 매튜 아저씨와 달라서 그렇지 마릴다는 따뜻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이 인간적으로 이해가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것이라는 말을 누가 했더라. 주말에 좀 쉬려고 하면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는 말썽꾸러기 둘리 친구들이 얼마나 미웠을까 싶다.

많고 많은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늘 일에 찌들어 신경질 대마왕이 된 소시민 고길동의 삶이 이제야 내 눈에 보인다. 허락 없이 대뜸 집에 쳐들어와 식객이 된 둘리가 길동이는 얼마나 미웠을까. 길동이에게 둘리는 여간 낯선 존재가 아닌데, 가장으로서 그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길동이가 내 친구라면 조용히 등긁개를 하나 선물하고 싶다. 둘리, 도우너, 또치, 희동이가 합심해서 괴롭히면 등 긁는 척을 하다가 꿀밤 한 대씩 먹여주라고 말이다. 

백영옥 소설가
몇 년 전,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라는 에세이집을 썼다. 어쩌다 그런 어려운 제목을 짓게 됐는지 모르겠다. 당시 그 책을 마무리하면서 서문을 꽤 비장하게 적어 내려갔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들 속에서도 낡아가는 시간의 주름을 본다고. 눈에 보일 리 없는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리 없는 것들이 들리기 시작하면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고 말이다.

열네 살이 보던 앤과 마흔 살에 보는 앤. 어린이, 청소년, 청춘을 거쳐 어른의 시간에 보는 앤은 저마다 다른 빛깔이지만, 내가 여전히 몇 번이고 읽어볼 만큼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아, 아주머니. 내일은 아무 실수도 하지 않은 새날이라고 생각하니 즐겁지 않으세요?

내 말해 두겠는데 말이다. 틀림없이 넌 내일도 실수를 저지를 걸? 너처럼 실수를 자주 하는 아이는 처음 본다.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단 한 가지, 그런대로 좋은 점이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전 똑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거든요.

저런 저런…. 잇따라 새로운 실수를 하니까 마찬가지지 뭐.

어머. 아주머니, 모르세요? 한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에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을 거예요. 아,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여요.

‘앤이 해준 말’이라는 원고를 쓰다가 나는 이 대사를 읽으며 앤에게 말하듯 이렇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앤∼ 이 언니가 살아보니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에는 한계가 없단다. 그것만은 분명해. 넌 앞으로도 계속 실수하며 살 거야. 그러니 실수를 감당하는 법을 익히렴. 하지만 네 낙천성은 잃지 않기를 바랄게.”

앤은 그 후로도 셀 수 없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지만 잘 자라나 어엿한 숙녀가 된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가고, 그 시절엔 드물게 ‘선생님’이 되어 경제적으로 자립하며, 눈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 아줌마를 위해 에이본리에 머무르는 제법 어른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그 옛날, 내가 어린이 시절에 보던 종이접기 김영만 아저씨가 텔레비전에 나와 하는 말을 듣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어린이 여러분, 참 잘 자라 주었어요. 걱정 말아요.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앤도 참 잘 자라 주었다. 나의 앤에게 고마웠다.

백영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