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이 인간적으로 이해가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것이라는 말을 누가 했더라. 주말에 좀 쉬려고 하면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는 말썽꾸러기 둘리 친구들이 얼마나 미웠을까 싶다.
많고 많은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늘 일에 찌들어 신경질 대마왕이 된 소시민 고길동의 삶이 이제야 내 눈에 보인다. 허락 없이 대뜸 집에 쳐들어와 식객이 된 둘리가 길동이는 얼마나 미웠을까. 길동이에게 둘리는 여간 낯선 존재가 아닌데, 가장으로서 그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길동이가 내 친구라면 조용히 등긁개를 하나 선물하고 싶다. 둘리, 도우너, 또치, 희동이가 합심해서 괴롭히면 등 긁는 척을 하다가 꿀밤 한 대씩 먹여주라고 말이다.
백영옥 소설가 |
열네 살이 보던 앤과 마흔 살에 보는 앤. 어린이, 청소년, 청춘을 거쳐 어른의 시간에 보는 앤은 저마다 다른 빛깔이지만, 내가 여전히 몇 번이고 읽어볼 만큼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아, 아주머니. 내일은 아무 실수도 하지 않은 새날이라고 생각하니 즐겁지 않으세요?
내 말해 두겠는데 말이다. 틀림없이 넌 내일도 실수를 저지를 걸? 너처럼 실수를 자주 하는 아이는 처음 본다.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단 한 가지, 그런대로 좋은 점이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전 똑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거든요.
저런 저런…. 잇따라 새로운 실수를 하니까 마찬가지지 뭐.
어머. 아주머니, 모르세요? 한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에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을 거예요. 아,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여요.
‘앤이 해준 말’이라는 원고를 쓰다가 나는 이 대사를 읽으며 앤에게 말하듯 이렇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앤∼ 이 언니가 살아보니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에는 한계가 없단다. 그것만은 분명해. 넌 앞으로도 계속 실수하며 살 거야. 그러니 실수를 감당하는 법을 익히렴. 하지만 네 낙천성은 잃지 않기를 바랄게.”
앤은 그 후로도 셀 수 없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지만 잘 자라나 어엿한 숙녀가 된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가고, 그 시절엔 드물게 ‘선생님’이 되어 경제적으로 자립하며, 눈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 아줌마를 위해 에이본리에 머무르는 제법 어른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그 옛날, 내가 어린이 시절에 보던 종이접기 김영만 아저씨가 텔레비전에 나와 하는 말을 듣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어린이 여러분, 참 잘 자라 주었어요. 걱정 말아요.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앤도 참 잘 자라 주었다. 나의 앤에게 고마웠다.
백영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