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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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서 부활한 궁중무용… 시민의 춤사위로”

[차 한잔 나누며] 광복절 인사동서 복원 후 첫 공연 펼치는 박은영 교수
1829년 2월 12일 이경(밤 9∼11시) 창경궁 자경전 뜰에서 ‘인문(人文) 파티’가 열렸다. 당시 조선 군왕이던 순조의 40세 생일과 국왕 등극 30주년을 기념해 야간에 벌인 궁중잔치 ‘야진찬(夜進饌)’은 시(詩), 예(禮), 악(樂)이 모두 갖춰진 인문의 향연이었다. 군왕을 축하하기 위해 시를 지어 낭송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스토리텔링)를 만들었다. 왕과 효명세자를 위한 잔치에서 66명의 집사들은 각자 역할을 정확히 지켜가며 엄숙하면서도 따뜻한 예를 행했다. 75명의 악사들은 최고 기량을 발휘해 음악을 연주했고, 26명의 무희들은 아름다운 몸짓으로 단아한 춤사위를 그려냈다. 궁중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 위로 찬란한 휘장과 세상의 온갖 꽃들이 연회장을 수놓았다. 당대 최고 기술을 자랑하던 장인들의 의례용 기물들은 연회의 기품과 격을 한껏 높였다.

영명하고 지혜로운 우리의 조상들이 빚어낸 그날의 야연(夜宴)을 오늘날 우리는 공연 형태로 감상할 수 있다. 박은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기록 속에 미라처럼 누워 있던 궁중무용을 깨워 복원해냈기 때문이다.

“궁중무용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고 말하는 박은영 교수는 15일 서울 인사동에서 악학궤범 내용을 풀어 복원한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을 일반에 재현해 보인다.
서상배 선임기자
박 교수는 ‘조선의 마지막 무동’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1909∼2007) 선생으로부터 직접 춤을 전수받았다.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심소 선생은 14세에 이왕직아악부원으로 전통춤과 노래, 악기를 연주했어요. 1923년 순종 황제 탄신 오순 경축공연에 무동으로 출연했고, 1932년에는 아악 수장이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궁중무용을 전승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다 2007년 8월에 떠나셨죠.”

그는 이화여대 무용과 재학 시절 심소 선생의 처용무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 일찍이 선생이 몸으로 익혔던 13종을 포함해 31종의 궁중무용 재현작업에 참여하며 이 춤들을 이수했고, 김천흥 선생의 춘앵전 전수조교 인증을 받았다. 사제의 이 같은 노력은 54종의 궁중무용 가운데 51종을 복원, 재현함에 기여한 바 크다. 박 교수는 이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양대 대학원에서 ‘궁중정재의 시대적 변천과 철학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궁중무용을 연구하는 교수는 현재 그가 유일하다.

‘어떻게 하면 궁중무용을 이 시대에 맞도록 되살려낼까’를 늘 고민하고 구상하던 그는 마침내 또 한번 커다란 ‘비밀의 매듭’을 풀었다. 그동안 명료하게 읽어내지 못하던 ‘악학궤범’의 내용을 해석, 복원해낸 것이다. 성종 때 완성된 ‘악학궤범’을 통해 그나마 우리 춤 원형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지만 아예 사라지거나 부분적 형태만 남아 있는 당시 춤들을 복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30여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서 무동이 썼던 가면인 동연화관(銅蓮花冠) 10개를 최초로 복원해냈다. 동연화관이 10바라밀의 형상과 흡사하다는 점을 통해,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 도교의 학과 불교의 10바라밀, 유교의 처용을 모두 아우른 우리의 전통 유불선 사상을 구현한 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궁중무용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작품은 ‘처용무’(39호)와 ‘학·연화대합설무’(40호) 두 가지다. ‘악학궤범’에는 두 작품이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란 이름으로 묶여 하나의 연희로 기록돼 있다. 무용인들은 이의 원형을 복원하려 했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춤은 문헌기록과 몸에서 몸으로 익히며 연명하는 것으로 전승되는데, 대개 후자의 방식으로 이어져 왔어요. 이번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그간의 몸 전승을 넘어, 기록을 해석해 재현한 것이어서 의미가 큽니다. 특히 가면은 궁중 춤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거예요.”

평소 궁중무용을 누구나 쉽게 다같이 즐길 수 있는 춤으로 전파해온 그는 이번에 발굴, 복원한 내용 또한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국운 융성을 빌고 국민 행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15일 서울 인사동 초입 남인사예술마당에서 사단법인 궁중무용춘앵전보존회가 여는 ‘시민과 함께 하는 궁중무용 잔치 여민마당’을 통해 선보인다.

“오후 1시부터 해질녘까지 인사동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시민들과 외국인들에게 궁중무용의 절제미와 고고한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임금의 정전(正殿)에 그리는 대형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배경 삼은 무대 위에서 초중고 학생들과 전문무용수, 일반인들로 이루어진 공연진까지 두루 참여한 마당은 ‘임금이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여민(與民) 정신을 공감하는 시간이자, 궁궐의 높은 벽 속에 갇혀 있던 궁중무용을 일반인의 춤으로 해방시키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공연은 1부 ‘춘앵전 유비쿼터스 편재’, 2부 족도(足蹈) 요신(搖身) 환무(歡舞), 3부 악학궤범의 ‘학연화대처용무합설’ 복원 및 재현 ‘동연화관’ 순으로 진행된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