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욱의 비교는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사 반가사유상과 83호를 대상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손에서 우위가 갈린다.
![]() |
| 한국 불교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78호(사진 왼쪽), 83호 반가사유상이 국립박물관 특별전에서 2004년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전시된다. 두 불상이 제작된 6, 7세기쯤 고대 한국은 인도, 중국을 거쳐 발전한 반가사유상이 절정을 맞은 무대였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안병욱이 78호, 83호를 비교한 것은 2004년 전시회 때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사하면서 다른 유물은 모두 빼고, 두 점만 남겨 전시할 때였다. 한국 불교 조각 중 최고로 꼽히는 두 유물의 우열을 비교하는 ‘모험’은 78호, 83호를 한눈에 보고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은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교체전시, 해외 대여 등으로 두 점이 함께 전시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78호, 83호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회가 2004년 이후 처음으로 열린다. 25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는 ‘고대불교조각대전-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특별전이다. 광륭사 반가상은 없지만 일본을 비롯해 중국, 인도 등의 불상을 여러 점 모아 한국의 불상과 비교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 |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일광삼존불상(왼쪽)과 인도 간다라의 불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처음 등장한 곳은 인도의 간다라 지역이었다. 간다라의 반가사유상은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다른 그것처럼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올린 자세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풀어진 모습이며 다리의 자세는 다양하다. 서기전 2, 3세기쯤 작품인 ‘연꽃을 든 보살’이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5, 6세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간다라에서 다양한 도상으로 출발한 반가사유상은 6세기 중엽 중국에서 미륵보살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산둥성 용흥사지에 나온 반가사유상은 넓은 어깨, 입체적인 얼굴, 옷을 걸치지 않은 상반신 표현에서 북제시대의 조각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6, 7세기의 고대 한국은 반가사유상이 절정을 맞은 무대였다. 당시 성행하던 미륵신앙과 결합돼 미륵보살상으로 완전히 정착했고, 독립된 공간에서 숭배되며 일본으로까지 전해졌다. 이때는 대형 작품도 등장하는데 경북 봉화군 북지리에서 발견된 반가사유상은 남아 있는 것만 1.7m에 이른다. 없어진 상반신까지 합치면 3m에 달할 것으로 추정돼 동양 최대의 것으로 꼽힌다. 전반적인 자세와 대좌 위를 덮은 자연스러운 표현의 옷주름 등은 83호와 비슷하다. 하지만 허리가 과장되게 가늘고, 높이 치켜 든 오른쪽 무릎 등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세속의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시작한 반가사유상의 인간적 사유는 시간이 흐르고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되면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신의 사유로 점점 바뀌어 갔다”고 설명했다.
특별전에 출품된 작품은 국내외 26개 기관 210건으로 반가사유상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불상을 보여준다. 인도의 불상에서는 ‘무불상(無佛像)의 시대’가 끝낸 초기 불상 시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불상에서는 인도에서 전해진 불상의 기본 형태를 유지하면서 특유의 양식을 발전시켜가는 과정이 확인된다. 한국의 불상이 전해진 뒤 시작된 일본의 불상 제작 초기 단계의 금동상들도 만날 수 있다.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일광삼존불상은 7세기 초 조성된 호류사가 일왕가에 헌납한 보물인데 가운데 불상의 옷을 입은 형식이나 광배의 형태 등을 근거로 한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금동불의 대표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영나 관장은 “불상은 불교가 전해진 모든 지역에서 놀라운 전파력, 흡수력을 보이며 아시아의 어느 미술형식보다 다채롭게 발전했다”며 “불상을 매개로 본 세계 각지의 문화 교류는 오늘날 박물관이 추구하는 가치에도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