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왓슨 지음/박병화 옮김/글항아리/5만4000원 |
나치가 패망한 지 70년 만에 독일이 다시 유럽 패권을 쥐고 있다. 1933년 이전 독일은 거의 잊혀진 듯하다. 과거 독일은 히틀러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국에서 가르치는 독일사는 나치시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럽 각국의 독일 관련 서적은 거의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간에 머물러 있다. 그 엄청난 전쟁 범죄는 결코 잊혀질 게 아니다. 그렇지만 독일인 모두가 히틀러와 ‘한 탯줄’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뉴욕특파원을 지낸 피터 왓슨(72)은 과거 독일에 주목하면서 현재 유럽연합(EU)을 쥐락펴락하는 오늘의 독일을 오버랩시켰다. 과거 독일에서 어떻게 그토록 많은 천재가 나올 수 있었을까.
‘저먼 지니어스’는 바로크시대 음악가 바흐로부터 1933년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250년 동안 독일에서 많은 천재들이 나온 이유를 추적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아이슈타인. 글항아리 제공 |
14~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벌어졌던 것과 정확히 같은 현상이 독일 대학에서도 나타났다. 이탈리아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라 사피엔자 대학을 개편하면서 르네상스운동이 태동되었듯 독일 대학에서도 변혁이 일어났다. 특히 17세기 말~18세기 전반 새로이 문을 연 대학 네 곳이 독일의 지식풍토를 바꾸어 놓았다. 네 곳 중 괴팅겐대학은 가톨릭신부의 통제권을 제한한 최초의 대학이 되었다. 대학에서의 사상과 저술, 출판의 자유는 비할 데 없이 신장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박사학위(PhD)’를 도입한 괴팅겐대학의 시스템은 독일 전 대학으로 퍼졌고, ‘인텔리겐치아’ 즉 교육받은 중산계층의 성장을 촉진했다.
독일에 천재가 그토록 많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저자는 풀이한다. 독일에서 천재는 영감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미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예컨대 19세기 걸출한 음악가들은 모두 독일어권 출신이다. 작가 토마스 만은 “독일인이 되지 않고서 음악가가 되는 일이 가능했을까”라고 했다. 이런 음악적 토양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독일어로 말하고, 듣고, 쓰고, 생각하는 가운데서 솟아난 이른바 독일적 교양이었다. 독일에서의 음악은 궁정이나 교회, 즉 특권층의 음악이 아니었다. 작곡가들은 맘껏 곡을 쓸 수 있었고 대중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바흐, 헨델, 바그너, 브람스, 슈만, 말러,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그리고 가장 유명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가 탄생했다.
과학 분야도 선구적이었다. 원자력을 규명한 19세기 말 소립자물리학, 엔진의 원리인 열역학 등 수많은 과학적 성취를 이뤄냈다. 1859년 영국인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했을 때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인 나라는 독일이었다. 신이 없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내려 애쓰면서 독일 관념론이 출현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이나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바로 이즈음 탄생했다.
유럽 변방이었던 독일이 1933년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250년 동안 미국보다 더 창조적이고 뛰어난 나라였음을 저자는 밝혀낸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낸 나라,교육받은 중간계층을 처음 형성한 나라, 대학과 연구소의 나라가 독일이었다. 저자는 이어 독일이 히틀러 이후 어떻게 회복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