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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현장] 경쟁력 vs 정체성…'男'자 원하는 女大 거센 내홍

“대학 경쟁력 올릴 지름길” VS “창학 이념 어겨 정체성 훼손”
“배화여대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배화여중·고 총동문회’는 지난 12일 서울 KT광화문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인 설립목적을 정한 정관 1조 중 ‘여성교육’에서 ‘여성’을 삭제하고 배화여대 평생교육원의 남학생 모집을 허용한 지난 6월 학교법인 배화학원 이사회의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총동문회는 학원 측이 최근 동창회관을 일방적으로 폐쇄하면서 30년 넘게 매월 개최했던 월례회를 진행하지 못하게 되자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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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공학 추진을 둘러싼 내홍은 배화여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초 덕성여대가 남녀공학 전환 의사를 밝힌 것을 시작으로 숙명여대도 일반대학원의 남학생 모집을 위해 학칙 개정 등을 추진하다 재학생과 졸업생 등의 반발에 직면, 관련 논의를 중단했다. 그러나 급한 불만 끈 상태일 뿐 논란의 불씨는 여전하다. 여대 입장에서 남녀공학 전환 여부가 대학 경쟁력과 직결돼 있다는 인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 여대 관계자는 “당장 대학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 남녀공학 전환이기에 내년에 비슷한 논란이 다시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 남녀공학 추진하는 여대들


여대들이 ‘금남’의 빗장을 풀려는 것은 대학 입학생 감소 등에 대응한 정부의 대학구조개혁과 맥이 닿아 있다. 2018년을 기점으로 고교 졸업자 수가 전체 대학 입학정원보다 적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정부는 2023년까지 3년 주기의 평가를 통해 대학 입학정원 16만명을 줄일 계획이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학생 충원율과 졸업생 취업률 등의 평가지표를 들이대며 낮은 등급을 받은 대학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압박하고 있다. 해당 대학은 입학정원 감축과 정부재정 지원 제한 등을 감수해야 한다. 남녀공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항목에서 불리한 여대들의 위기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여대 관계자는 “여성 졸업생들은 취업 이후 출산, 결혼, 양육 문제 등으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수치로 나타나는 취업률에서 여대가 불리한 게 사실”이라며 “남녀공학 전환 검토는 그런 현실적인 고민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덕성여대 이원복 총장은 지난 3월 취임사에서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 평가에 따른 입학정원 감축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우리 대학의 대대적인 체질 개선과 평과지표 개선에 전력하겠다”며 이를 위한 7대 전략 중 하나로 ‘남녀공학 전환 검토’를 제안한 바 있다.

일반대학원의 남학생 모집을 추진한 숙명여대나 산업체 위탁생 등 정원 외 학생모집에 남학생을 포함하려는 배화여대는 자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월 숙명여대는 평의원회에 해당 안건을 올리면서 대학원 연구역량 강화, 재정난 해소 등을 그 이유로 제시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성별을 뛰어넘어 인력풀을 넓히면 대학원 연구 경쟁력이 나아질 것이라는 의견이 내부 교수, 연구진 사이에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남학생 들이기’ 잠정 보류… “정체성 훼손” 반발


올해 남학생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려고 시도했던 여대는 대부분 관련 논의를 잠정 중단했다. ‘정체성 훼손’을 명분으로 한 재학생, 졸업생 등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숙명여대 총동문회는 결의문을 통해 “일반대학원 남녀공학 전환은 109년 숙명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창학·교육이념에도 정면으로 위배되기에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남녀공학 전환 불가입장을 못 박았다. 배화여중·고 총동문회도 “배화학원의 근간 흔드는 사안을 공청회 한 번 거치지 않은 사실은 배화 학내 구성원 모두의 정체성을 짓밟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목청을 높였다.

숙명여대는 일단 “없었던 일로 하겠다”며 백기를 들었고, 배화학원 측도 “(정관 개정은) 남녀공학 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법률적, 시대적 사정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 덕성여대도 내부 의견수렴을 이유로 들며 총장 취임사 발표 이후 진전된 게 거의 없다. 

‘배화여중·고 총동문회’가 지난 12일 서울 KT광화문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법인 배화학원 이사회가 법인 설립목적을 정한 정관 1조 중 ‘여성교육’에서 ‘여성’을 삭제한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 
배화여중·고 총동문회 제공
일각에서는 “각 대학의 특수성을 배제하고 ‘줄세우기 경쟁’을 시키는 현행 대학평가제도가 고유한 가치를 지닌 여대들을 죽인다”고 지적한다. 실제 부산여대에서 남녀공학으로 전환한 신라대를 연구한 논문 ‘남녀공학으로 전환댄 대학의 ‘여성리더’ 에 대한 연구’(김은진·2002)에 따르면 남녀공학 전환 이후 학생회 조직 내 여성 리더는 수직으로 배제됐으며 성차별적 담론이 학내에 형성, 유포됐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재학생들도 대체로 여대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나 일부 학생들은 남녀공학을 선호하기도 한다. 한 여대의 학생은 “여학생만 경쟁하다 보니 다양성을 키우는 차원에서 미흡한 측면이 있다”면서 “여학생들은 남학생에 비해 취업에 올인하지 않는 경향도 있어서 취업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