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회장으로선 한전 부지 매입이 10조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고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 회장이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국가 기여’ 측면도 어느 정도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베팅이 성공할지 여부는 물음표로 남아 있다. 상식적인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투자다. 훗날 실패로 판명될 경우 ‘이윤 창출’보다 ‘국가 기여’를 앞세운 ‘잘못된 투자’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김기홍 논설실장 |
박근혜 대통령이 청년희망펀드를 제안했을 때 정부는 기업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임원들의 250억원 기부를 시작으로 대기업 총수와 임원들이 희망펀드 기부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기업 돈’이 벌써 1000억원을 넘어섰다. 자발적으로 낸 것이라고 하지만 시중에선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권력 눈치를 살피고 기업들끼리 곁눈질하다 삼성의 행동 개시를 신호탄으로 펀드 행렬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펀드 대열은 본심을 숨긴 채 파티에 열중하는 가면무도회다.
가면무도회는 면세점 사업권 전쟁에서도 벌어졌다. 경쟁 대기업들도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가자미눈이 됐다는 자조 섞인 푸념이 나오고 있다. 사실상 신고제였던 면세점의 사업자 선정의 칼자루를 정부가 쥐게 되면서 정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업자 선정기준을 강화한다면서 심사기준에 경제·사회 발전 공헌도,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상생협력 노력 정도 같은 조항을 끼워 넣었다. 경쟁 기업들은 총수의 사재 출연을 비롯해 그룹 차원의 사회공헌 공약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냈다. 면세점 사업을 하려는 목적이 이익추구인지 사회공헌인지 모르겠다는 뒷말까지 나왔다.
기업이 경영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고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외부 눈치를 보면서 경영보다 사회기여에 골몰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기업의 본분은 첫째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고, 셋째 남은 이익을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가 남겼다. 돈을 깨끗이 벌어 좋은 데 쓰는 것이 기업이 할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 반기업 정서가 뿌리 깊은 데에는 기업의 잘못도 크다. 왜곡된 지배 구조와 세습 경영, 경영 과정에서 저지르는 불법과 탈법, 불공정거래와 같은 온갖 갑질 행태, 그리고 그런 잘못을 덮으려는 요식행위로 사회환원 카드를 남발하는 잘못된 관행 때문에 기업 활동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기업의 공익활동마저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든다.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설치와 포격 도발로 위기가 고조됐을 때 전역을 연기한 군 장병 특별채용을 발표한 롯데에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내부 경영권 다툼을 의식한 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남 눈치를 보면서 하는 기부는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위선을 베푸는 것이다.
기업은 반성해야 하고 기업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도 거둘 때가 됐다. 기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기업이 알아서 하게 놔두는 것이 좋다. 기업은 그저 본업에 충실하면 된다.
김기홍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