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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 불패의 비결은 '화포와 판옥선'

“명량해전 승리의 비결은 화포와 판옥선이었다”
해양문화재硏, 진도해역 발굴성과 공개
전남 진도군의 울돌목 인근 해역에서 발굴된 소소승자총통과 석환. 승자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개인화기였고, 석환은 대형화포의 발사체로 사용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012년 11월 전남 진도군 울돌목에서 동남쪽으로 약 4㎞ 떨어진 바다에서 화기 3점이 발굴됐다. 이듬해 8월에는 지름 8∼9㎝의 석환(石丸·돌포탄) 여러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유물이지만 출수 지점이 예사롭지 않다. 울돌목은 이순신 장군이 전함 12척으로 330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한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이다. 발굴지점이 울돌목 인근이기에 이순신 부대와의 관련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마침 화기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4년 전인 1588년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발굴을 담당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후속 발굴 성과에 주목해야 한다”면서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순신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더 따져봐야겠지만 화기와 석환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무기체계와 일본군에 대한 압도적 우위의 비결을 파헤치는 실마리가 된다. 건국대박물관 박재광 학예실장은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발굴조사 보고서’에 게재한 글에서 조선의 화약병기 개발과 운용에 대해 분석했다. 

◆조선군 개인화기 ‘소소승자총통’


3점이 발굴된 화기의 정식 명칭은 ‘소소승자총통’. ‘대·중·소승자총통’ ‘차승자총통’ ‘별승자총통’ 등으로 분류되는 승자총통의 한 갈래다. 승자총통은 선조대에 개발돼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대표적인 소형화기였다. 손으로 직접 화약선에 불을 붙이는 ‘지화식’이고 총신 길이를 이전 개인화기보다 2∼3배 길게 제작했다. 사거리는 최대 700m, 적을 살상할 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160m 정도였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1592년 6월 2일 벌어진 해전에서 승자총통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전남 여천시 백도 앞바다에서 여러 종류가 인양된 적도 있어 당시 조선 수군이 승자총통을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승자총통은 70여점이 전한다. 하지만 소소승자총통은 문헌에 없었고, 실물로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분석 결과 소소승자총통에는 가늠자와 가늠쇠가 없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소승자총통이 가늠자, 가늠쇠에다 개머리판의 초기 형태인 ‘총가’까지 갖추어 조준사격이 가능하도록 했던 것에 비하면 “낮은 단계의 기술적 구조와 특징”을 보인다. 박 실장은 “소소승자총통의 명문에는 ‘좌영조’(左營造)라고 되어 있어 전라좌수영에서 제작한 무기가 아닌가 싶다”며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소승자총통에 비해 기술적으로 다소 뒤떨어진 것은 무기 생산체계에서 지역별 격차가 있었음을 재확인시켜준다”고 밝혔다.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은 튼튼한 선체, 높은 갑판 등의 특징을 지녀 화포전술과 당파전술을 운용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화포와 판옥선, 조선 수군 비교우위의 포인트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 ‘명량’을 찬찬히 보면 명량해전은 포격으로 시작해 ‘당파’(배를 충돌시키는 전술)로 끝난다.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대해 가졌던 비교우위의 포인트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형화포의 발사체로 보이는 석환이 내포한 의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승패는 전선과 화기 성능에서 갈렸다. 판옥선은 선체가 크고 무거운 군선이었다. 대형화포의 발사 충격을 견딜 만큼 충분히 튼튼했고, 갑판도 높아 포탄을 멀고 정확하게 날릴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주력선인 ‘세키부네’는 선형이 가늘고 선체가 얇게 건조됐다. 전술 차이는 여기서 비롯됐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의 사방에 대형화포를 장착해 함포전술을 구사했다.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훨씬 길었기 때문에 선제공격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다. 튼튼한 선체는 당파전술로 일본 전함을 수장시킬 수 있는 바탕이었다.

대형 화포에는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 등으로 불린 큰 화살을 발사체로 사용하기도 했다. 화포에서 사용한 큰 화살의 파괴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일본군을 따라 종군했던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들의 선박은 강하고 크며 위로 뚜껑이 있다. 화약솥과 화기들을 사용하는데… 거의 남자의 넓적다리 굵기의 화살 모양 나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쇠를 박아서 집어넣는데, 부딪치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렬하다.”

박 실장은 “화포를 바탕으로 한 포전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이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며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연승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