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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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픈’ 네 여자의 현실… 장진의 코미디 내공으로 풍자

연극 ‘꽃의 비밀’
연극 ‘꽃의 비밀’(사진)은 웃지 않고는 못 배길 작품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 이후 13년 만에 신작 연극으로 돌아온 ‘작가’ 장진의 코미디 내공은 변함 없었다. 작품은 관객의 기대를 툭툭 비껴가며 웃음보를 건드렸다. 코미디를 위한 작위나 유치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극의 맥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웃음과 독특한 리듬을 잘 살린 배우들의 호연이 빚은 결과다.

배경은 보수적인 이탈리아 북부 시골이다. 남편 네 명이 축구에 미쳐 있는 사이 이들의 부인 네 명이 모이면서 겪는 소동을 담았다. 인물들의 개성이 매력적이다. 맏언니 격인 소피아는 코미디의 주춧돌을 놓는다. 타이밍이 흐트러지면 자칫 허공에 뜰 대사들을 정확히 내놓으며 극을 안정적으로 이끈다. 술병을 끼고 사는 ‘터프녀’ 자스민은 캐릭터 자체가 정겹다. 여배우가 됐을지도 모를 아름다운 모니카, 공대를 수석 졸업한 모범생 지나도 뚜렷한 색을 발산한다.

작가 장진은 보는 이의 예상을 배반하며 웃음을 유발한다. 지나가 입맛이 없다며 심히 수상쩍게 도망치자 소피아가 한참 응시하는 장면도 그렇다. 관객은 곧이어 ‘이상하네’ 식의 독백과 함께 사건이 진전되리라 기대하지만, 그 순간 소피아는 “어떻게 하면 입맛이 없는 거야?”라고 엉뚱한 말을 한다. 중년의 식어버린 부부 관계를 풍자하는 소피아의 대사 역시 절로 큭큭거리게 한다.

코미디 같은 상황 아래에 사회적 모순이 스며나오게 하는 장진 특유의 작법도 그대로다. 지나는 고된 농사일에 더해 가사까지 떠안고, 소피아는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모니카는 남편의 숱한 불륜을 못 본 척 넘긴다. 보수적 사회에서 이들이 경제적으로 홀로 설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웃음이 강해서인지 혹은 인물들이 순진하고 따뜻해서인지 삶의 신산함이 주는 페이소스까지 느껴지지는 않는다. 연말 2시간 동안 밝고 아낌없이 웃을 만한 작품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꽃의 비밀’은 수현재와 문화창작집단 수다가 손잡고 만들었다. 내년 1월 31일까지 서울 대학로 DCF 대명문화공장에서 공연한다. 4만~5만원. (02)766-6506

송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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