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유니폼 넘버, 10…①10번의 기준…펠레
아버지가 발명왕 에드슨같은 사람이 되라며 지어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Edson Arantes Do Nascimento)'라는 긴 이름의 가진 펠레(1940년 10월 23일생)는 축구 그 자체이다.
월드컵 3회 우승, 브라질 프로축구 1부리그 최연소 득점왕(16세), 최연소 월드컵본선 선발(만17세), 통산 1281골이라는 기록만으로 펠레의 위대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오죽하면 브라질 의회가 펠레에 대해 해외진출금지 법안까지 만들었을까.
펠레가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인가 아닌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뜻을 달리한다. 하지만 야구의 베이브 루스가 홈런으로 야구 자체를 바꿔놓았듯이 펠레는 축구자체를 예술과 역동성이 결합된 그 무엇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붐을 가져오는 등 펠레로 인해 축구가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축구역사가들은 축구를 펠레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고 있다.
▲ 기록으로 본 펠레
역사가는 기록으로 그 선수를 평가할 수 밖에 없다. 펠레의 기록은 열기하기 힘들 정도이다.
유일무이한 월드컵 3회 우승 멤버이다. 펠레는 브라질 대표선수로 1958년 월드컵, 1962년 월드컵, 그리고 1970년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만약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도 비겁한 태클로 인한 부상만 아니었다면 4회연속 월드컵 우승 주역이라는 기록까지 남겼을 것이다.
펠레는 1363경기(친선경기 포함)에 나아 1281골을 넣었다. 해트트릭 92회,1경기 4골 31회,1경기 5골 이상 6회를 기록했다.
월드컵에선 14경기에 나와 12골을 집어 넣었다.
▲ 한국에 온 펠레
현역시절 지금의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합쳐 놓은 듯한 인기를 모았던 펠레는 지난 1972년 6월 2일 소속팀 산토스와 함께 한국을 찾아 당시 동대문운동장에서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펼쳤다.
한국은 이세연(GK), 김호, 김호곤, 박영태, 김경중(이상 DF) 이차만, 고재욱(이상 MF) 이회택, 박이천, 박수덕, 차범근(이상 FW)를 선발로 내세웠다.
이차만이 펠레를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펠레는 전반 내내 피해 다니다가 후반 13분 골을 터뜨려 운동장을 가득 메운 한국팬들로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그날 산토스는 한국대표팀을 3-2로 눌렀다.
기자도 친구들과 함께 텔레비젼이 있는 집으로 몰려가 산토스 경기를 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유행했던 축구 단어가 '바나나 킥'이었다. 팬들은 펠레가 코너킥을 차면 바나나처럼 휘어져 그대로 골인된다며 "지어낸 말이다" "아니다" "그럼 너가 차 봐라"는 등 갑론을박을 벌였다.
▲세계 최강팀의 17세 스트라이커, 사상 최연소 월드컵 본선 득점
메시가 최고인가, 펠레가 최고인가는 참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시대가 다르고 가치 평가 기준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대를 관통했는가, 압도적 우위를 지녔는가, 축구를 한 차원 다른 존재롤 올려 놓았는가, 경기 스타일을 변화 시켰는가 등 등을 종합해 고려 해야 한다.
펠레의 경기 모습도 보고(중계화면을 통해서였지만), 메시의 플레이도 지켜본 사람으로서 조심스럽지만 펠레가 메시보다 좀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펠레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만 17세의 나이로 브라질 국가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브라질 대표팀은 세계 최강이었다. 세계최강은 풍부한 선수 자원과 광적인 팬들 덕에 이뤄졌다.
이런 상태에서 17살짜리가 브라질 대표팀 핵심 멤버로 뽑혔다는 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는 '압도적 존재'라는 뜻이다.
펠레는 1958월드컵에서 무려 6골을 터뜨렸다. 웨일즈와의 8강전에서 결승골, 프랑스와의 4강전 해트트릭, 스웨덴과의 결승전 2골을 기록했다.
펠레가 웨일즈와의 8강전에서 터뜨린 득점은 역사상 월드컵 본선 최연소 득점기록(17세 239일)이다. 역시 프랑스전 해트트릭도 월드컵 본선 역사상 최연소(17세 244일) 해트트릭이다.
▲축구를 예술로 끌어 올린 축구황제
펠레는 축구선수 중 처음으로 황제라는 말을 들었다. 축구에 별반 관심이 없었던 미국도 펠레로 인해 축구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펠레에게 황제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이후 축구황제 수식어는 마라도나, 메시 등 당대 압도적 스타에게 따라 다녔다.
펠레는 축구 경기를 힘, 남성미, 원시적 아름다움이라는 기본토대위에 예술성까지 입힌 인물이다.
춤을 추는 듯한 드리블, 탄사를 자아내는 경기감각 등으로 한편의 잘 만들어진 클래식 발레인 것처럼, 때로는 삼바 페스티벌처럼, 때로는 현대무용을 보는 듯한 플레이를 해 경기내내 아름다운을 느끼게 했다. 아름다움은 곧 예술이다.
▲ 브라질 의회가 '국보'로 지정 등
펠레가 워낙 뛰어난 실력을 선 보이자 브라질 의회는 1962년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해외 진출을 금지시켰다. 이 까닭에 펠레는 현역시절 제대로 돈을 벌지 못했다.
대표팀 은퇴 미국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미 축구 리그에서 뛰면서 제법 많은 돈을 만졌지만 그로선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이밖에 펠에와 얽힌 재미있는 몇몇 이야기를 보면 1970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 당시, 양측 당사자들은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48시간의 휴전에 합의, 이란 국왕이 펠레를 만나기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다,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는 등이 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