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담했던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낸 건 ‘지도에 없는 길’ 때문이다. 취임 당시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말 “지도에 없는 길을 쉼 없이 달려왔다”고 자평했다. 그러니 내우외환의 한국경제도 ‘지도에 없는 길’을 꽤 멀리 달려왔을 테고 지금도 그 길 위에 있다. 낯설고 험한 환경에서는 지도에 선명한 길도 잃기 십상인 터에 ‘지도에 없는 길’을 가는 건 오죽할 것인가. 의구심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경제 현실을 보면 “우리 경제의 활력회복과 구조개혁을 위해서”라는 최 부총리의 설명을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지도에 없는 그 길은 과연 ‘안전한 숙소’로 연결되는 길이기나 한 걸까.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 |
그러나 과연 지금이 ‘저물가’인가. 공공요금을 중심으로 물가는 연말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통행료, 교통비, 주민세, 쓰레기 봉투값, 상하수도 요금 등 줄줄이다. 인상계획을 보면 상승률도 두자릿수가 허다하다. 안 그래도 정부의 부동산 중심 내수부양으로 주거비 부담은 갈수록 무거워지는 중이다. 그런데 “저물가를 탈피하겠다”니, 가뜩이나 빚에 짓눌리고 치솟는 주거비에 허덕이는 서민들은 가슴을 칠 일이다.
지난해 소비자물가상승률은 0.7%로 낮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석유류와 농산물을 제외한 근원물가는 상승률이 2%대로 낮지 않다. 또 0.7%가 얼마나 현실 물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집값 상승이 무주택 서민 가계를 짓누르지만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집값 상승분은 반영되지 않는다. 전·월세가 반영될 뿐인데, 이 품목에서도 월세 전환이 늘면서 가계 주거비 부담은 커지는데 물가상승폭은 오히려 줄어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통계청 관계자는 “전세가 월세로 바뀌면서 상승폭을 줄이는 효과는 나타난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전세는 3.6%, 월세는 0.3% 올랐는데 월세 거래량은 전년보다 30% 이상 늘었다.
물가에 대한 의심은 통화정책의 심장부, 한국은행에서도 나온다. 한 고위관계자는 “공공요금이 뛰고 주거비가 무섭게 치솟는 상황을 두고 저물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부 경제정책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정책이 된다. 공직을 맡고 있는 한 경제학자는 “정부에 대세를 보면서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었는지 모른다. 세밑 인터뷰에서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하나도 먹히지 않는 옛날식 정책만 쓰고 있다”고,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산업화시대부터 쓰던 고장난 엔진을 돌리고 있다”고 평했다. ‘위기의 본질’을 모른 채 엉뚱한 처방을 쓰고 있다는 게 두 경제대가의 공통된 지적이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지도에 없는 길가에 ‘권총 위협’에 몸을 숨길 대피처는 있는 것일까.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