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한국 만화의 큰 별에 대한 애도 너무 미흡했던 건 아닌지…

〈132〉 만화가 이상무
'
# 만화라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


지금은 만화라는 것이 주로 온라인으로 유통되고 소비되기 때문에, 만화를 보는 공간은 ‘만화가게’ 혹은 ‘만화방’ 등으로 불렸던 구체적인 가로 세로 높이를 가진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사이버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한때는 대학가나 번화가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만화방들이 잠시 성업했던 적도 있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놀라운 속도로 확산된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 굳이 대본소를 찾아다니지 않고 내 방에서 컴퓨터를 통해 공짜로 만화를 볼 수 있게 되면서 만화가게의 시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만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만화를 본다. 만화는 현실의 공간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가상의 공간 속으로 수렴되었고, 그곳에 만화가들이 모여들고 그곳을 통해 대량의 만화가 대중에게 보급된다.

나는 그게 영 마뜩지 않다. 나도 가끔은 만화를 본다고 인터넷 창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기는 한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나 손가락의 터치로 떠오르는 화면을 통해 만화를 보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고 무엇보다도 잘 읽히지 않는다. 너무 보수적이며 낡은 자세라고 자책을 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만화를 보는 행위란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시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이 동원되는 행위이며, 만화를 보는 공간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 만화를 보던 곳은 그렇게 바람직한 공간이라 할 수는 없었다. 사방의 벽이 책장으로 가득한 까닭에 어둡고 환기도 잘 되지 않았고,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간혹 청소년 탈선 모의의 장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 때문에 부모님들이 특히 질색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이상하게 안온했다. 내가 보고 있는 만화에 빠져 키득키득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보면, 맞은편에서 비슷한 즐거움에 빠져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각자 하나씩 즐거운 마음을 가슴 가득 담고 행복해하던 공간…. 그곳이 바로 만화방이라는 아주 초라하고 남루하지만 묘한 온기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어릴 때 문득 나는 이런 곳이 낙원이 아닐까 하는 ‘불경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만화를 보는 것만큼 내 앞에 만화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을 보는 것도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 제일 부러웠던 아이는 집에서 만화가게를 운영하는 아이였다. 물론 내 친한 친구 중에는 그런 아이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분인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하루 종일 마음대로 만화를 볼 수 있고 벽에 가득한 만화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게 좋은 일일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에 지방 사시는 외삼촌댁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외삼촌은 여러 가지 사업을 하셨으나 모두 여의치 않아 만화가게를 차리기에 이르렀다.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새로운 사업이라 외삼촌댁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 집에 머무는 동안은 나도 만화와 가족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폭이 좁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바닥에 물도 뿌리고, 이런저런 잔심부름질을 하고 손님들을 살피기도 하며 꿈과 같은 여름방학을 보냈었다.

그 사업도 잘 되지 않아 외삼촌은 일 년도 못하시고 문을 닫았지만, 거지가 왕자와 옷을 바꿔 입고 잠시 왕자가 되어보듯 나도 잠시 꿈에 그리던 ‘만화가게 아들’이라는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왕관을 써봤었다.

만화가 이상무의 ‘비둘기 합창’ 표지. 특유의 서정적인 스토리와 독특한 캐릭터의 인물은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깊은 인상을 남기며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상무 홈페이지 ‘늙지 않는 소년’ 제공
# 유년의 기억을 지배했던 만화들


어릴 적 만화가게를 들락거리며 줄곧 봤던 만화들은 주로 임창, 길창덕 등이 그린 명랑만화였다. 나는 또래 아이들이 흔히 좋아했던 철인이 나오고 내공을 뿜어내는 활극이나 장엄하고 심각한 만화, 혹은 미래에 대한 공상이 가득한 만화보다는 즐겁고 밝은 만화를 좋아했다. 그런 명랑만화와 더불어 우리가 사는 주변의 이야기가 아주 실제적으로 그려지는 만화를 많이 읽었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에 다다른 곳은 독고탁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주인공이 나오는 이상무의 만화였다.

제일 처음 보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독고탁이 등장했던 것만 기억나는데, 보면서 가슴이 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그동안 만화를 보면서 느낄 수 없었던 진한 감정에 끌려 계속 이상무의 만화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오랜 야근 끝에 오랜만에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오셨던 어느 저녁, 처음으로 함께 책을 사러 가로등이 희미했던 밤거리를 나란히 걸어가 동네 서점에서 챙겨온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이상무의 만화였던 기억 역시 지금은 희미하다.

‘비둘기합창’, ‘우정의 그라운드’, ‘한국인’ 등의 작품은 마치 배우 김승호가 나오던 50~60년대 영화처럼, 혹은 ‘자전거도둑’, ‘철도원’ 등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이탈리아 영화처럼 어렵고 힘든 생활에도 좌절하지 않는 인간애가 느껴지는 내용들이었다.

주인공은 늘 동그란 두상에 짧은 머리와 휘둥그런 눈을 가진 귀여운 외모의 독고탁과, 좋은 집안 출신의 엘리트이거나 에이스인 안경을 쓴 준이라는 이름의 라이벌, 덩치가 커다랗고 사람 좋게 생긴 봉구, 그리고 숙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여주인공 등 네 명이다. 그들은 때로는 가족으로 나오고 때로는 유치원 동기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라이벌과 동지로 복잡하게 엮인 관계로 나온다. 마치 영화를 여러 편 찍는데 배우는 전성기 때의 홍콩영화처럼 조인성, 원빈, 송강호, 김태희가 계속 비슷한 캐릭터로 역을 바꿔 나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새로 펼칠 때 이미 나오는 각 캐릭터의 특성을 잘 알고 있으며, 내용의 진행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의도를 궁금해하며 만화를 계속 보게 된다. 당시로서는 무척 독특한 방식의 소비를 부르는 구조였다. 

이상무의 ‘우정의 마운드’ 마지막 페이지. 우리가 지나온 시절의 기억 속 풍경과, 당시의 시대상이 그림에 담겨 있다.
이상무 홈페이지 ‘늙지 않는 소년’ 제공
이상무의 만화의 주된 소재는 스포츠 중에서도 야구였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나오기 전이었고 고교야구의 전성기였던 시절이었다. 멀리 일본이나 미국의 프로야구의 열풍을 외신으로 희미하게나마 듣고 있었고, 뉴욕 양키스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신화를 들으며 “언제 우리도 저런 야구를 봐야 하는데”하며 부러워하던 시점이었다.

독고탁은 주로 투수로 나온다. 그리고 라이벌인 독고준이거나 그냥 준이거나 마사오이거나 하는 미끈하게 잘 생기고 차가운 인상의 주인공은 주로 독고탁의 공을 때리는 뛰어난 타자로 나온다. 덩치 크고 사람 좋게 생긴 봉구는 독고탁의 공을 받아내는 포수로 나온다. 그리고 숙이는 독고탁을 이끌어주고 지탱해주는 정신적인 지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배경은 우리나라 고교야구이기도 하고 때로는 일본의 프로야구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라는 작품은 재일동포 형제인 독고탁과 독고준의 이야기이다. 2차 대전 중 징용으로 끌려간 독고용은 일본인과 결혼을 하고 사업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준이고 둘째아들은 탁이다. 아버지는 한국인으로 계속 남고 싶어 하는데, 야구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큰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싫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의 아들임을 숨기고 철저히 일본인으로 활동을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아 졸업도 하기 전에 일본의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을 한다.

그리고 그의 동생 독고탁은 병들어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애잔하게 바라보며 한국인으로 살고자 한다. 또한 그도 역시 야구선수가 되려 하는데,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야구 경력도 일천하다. 그러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라이벌 팀인 한신 타이거스로 찾아가 테스트를 받고 어렵게 입단을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형제는 한국인으로서 극적인 상봉을 한다.

# 만화가 이상무를 추모하며

스포츠 만화의 원조는 물론 일본인데, 일본의 야구 만화는 일관된 이야기 방식이 있다. 동네 야구(그 종목은 테니스나 피겨스케이팅이나 심지어 발레일 수도 있다)에서 가볍게 경쟁을 하던 주인공이 어느새 지역 예선을 거쳐 꿈의 전국대회인 갑자원에 진출하고, 급기야 메이저리그에 가서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서며 국가대표가 되어 세계대회에서도 우승을 한다. 마치 게임에서 차근차근 레벨 업을 하듯 개인의 극한 노력과 성공 스토리가 큰 뼈대가 된다.

그에 비해 이상무의 만화에서는 물론 스포츠가 재미를 주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 바탕에 가족 간의 갈등과 사랑, 화해 같은 따뜻한 감성이 흐르며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만화가 이상무는 2016년 신년 벽두인 지난 3일 작업을 하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1966년 데뷔한 이래 그는 50년 동안 쉬지 않고 만화를 그렸다. 그가 만들어낸 특유의 서정적인 스토리와 독특한 캐릭터들은 만화가 단순히 아이들이 보는 오락물이나 저속한 대중예술이 아닌, 보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장르임을 보여주었다. 그가 활발히 활동하던 70년대와 80년대는 이상무와 독고탁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만화를 보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만화방들이 문을 닫으며 점점 만화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독고탁 역시 기억의 저편에 묻어둔 이름이 되어버렸다.

공교롭게도 작년 11월30일 일본의 원로 만화가인 미즈키 시게루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0여년 동안 만화를 그렸던 그는 요괴만화의 아버지라 불리며 요괴연구가로 자처하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1995년에는 세계요괴협회를 만들고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만의 독특한 요괴문화를 살려내고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만들어낸 것에 대해서는 좀 다른 정서라 무어라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그의 독특한 상상력의 영역이 놀랍다. 또한 60년 가까이 하나의 세계에 천착한 예술가에 대한 일본 사회의 성숙한 대접이 부럽기도 하다.

미즈키 시게루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돗토리현의 ‘미즈키 시게루 로드’. 사카이미나토역에서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까지 이어지는 800m 길에는 시민들의 참여로 제작된 100개가 넘는 다양한 요괴들이 도열하고 있다.
미즈키 시게루는 2차대전에 참전해 왼쪽 팔을 잃었던 전쟁 피해자였다. 그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의 만화를 그리기도 했고, 직접 보았던 일을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것이 최근 위안부 배상 문제로 시끄러운 시국에 알려져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여긴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병사들도 지옥에 있었지만 (위안부에게는) 지옥 그 이상이 아닌가’라고 위안부를 보며 생각했다. 자주 종군위안부의 배상문제가 신문에 실리는데 이 일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면 절대로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배상은 해야 된다고 언제나 생각한다.”

전쟁을 미화하는 일본의 극우 세력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반대하고 야유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과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정서를 상상의 세계 속에서 녹여내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만화를 그렸던 그의 작업에 대한 사회적인 경의는 대단하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에는 ‘미즈키 시게루 로드’라는 괴상한 길이 있다. 길이가 800m 정도 되는데 사카이미나토역에서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시민들의 참여로 제작된 100개가 넘는 다양한 요괴들이 도열하고 있다. 사람들은 착한 요괴, 악한 요괴, 귀여운 요괴 등 다양한 요괴들을 만나며 미즈키 시게루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미즈키 시게루 요괴 만화의 주인공 기타로.


기타로의 아버지 메다마 오야지는 유령족 중 눈 부분으로만 살아가는데, 기타로를 염려해 눈알의 모습으로 소생했기 때문이다.
미즈키 시게루뿐만 아니다. 또는 만화가만도 아니다. 일본만의 일도 아니다. 무언가 한 분야를 수십 년 파고들고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을 하고 그에 따른 예우를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자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어떤가 하고 생각을 해본다.

한동안 잊혔던 서양의 팝가수가 사망해도 사방에서 애도의 물결이 차고 넘치는데, 반세기 동안 만화만을 그렸으며 우리가 지나온 시절의 기억 속 풍경과, 당시의 시대상을 그림으로 담아낸 원로 만화가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애도가 지나칠 정도로 짧고 간단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든다.

50년 동안 우리의 이야기를 그려주었고 감동을 선사해주었던 만화가 이상무 선생의 명복을 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