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그래피티가 잔뜩 그려진 지하도다. 배우들은 뮤지컬처럼 살짝 춤을 추고, 마이크를 객석으로 넘긴다. 더 서술적이고 장식적이며 자유로워진다. 헝가리 스타 연출가 로버트 알폴디는 마치 ‘셰익스피어를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그는 연출의 변화를 통해 400여년 전 유럽 땅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가 현대 한국에서도 생명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겨울이야기’는 헝가리 유명 연출가 로버트 알폴디와 국립극단의 만남으로 일찌감치 관심을 받았다. 국립극단 제공 |
연극은 느닷없는 질투로 시작한다. 시칠리아 왕 레온테스는 친구이자 보헤미아 왕인 폴리세네스가 자신의 아내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착각한다. 레온테스 왕은 왕비를 감금한다. 아들은 친자라고 확신하지만, 갓 태어난 딸은 불륜의 결과라며 황무지에 버린다. 왕비와 아들이 충격으로 죽고 나서야 레온테스는 잘못을 깨닫는다. 황무지에 버려진 딸 페르디타는 양치기에게 길러진다. 16살이 된 페르디타는 신분차를 뛰어넘어 보헤미아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
새로울 것 없는 서사지만, 연극은 내내 몰입하게 만든다. “셰익스피어가 대단한 이유는 완벽하게 재미있고 대중문화와 예술을 제대로 합쳤기 때문”이라는 알폴디 연출의 말 그대로다. 운명은 막을 수 없지만 사랑과 우정을 향한 인간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도 생생히 살아 있다. 극 중에서 왕의 질투는 갑자기 생겨난다. 불가항력적인 비극이다. 그 결과 이어진 16년간의 후회와 고뇌는 결국 사랑과 우정을 굳건히 지킨 이들에 의해 막을 내린다.
이 극에서 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온테스의 의심이 시작될 때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 비가 새는 집을 보는 것처럼 불길하다. 왕과 공주가 재회할 때는 물이 그간의 고통을 시원스레 쓸어버린다. 그리고 극 마지막, 구구절절한 말 대신 인물들은 고요히 내리는 빗속에서 서로를 껴안는다. 같은 물이어도 형태에 따라 불길한 징조에서 축복의 세례로 바뀌듯, 인간사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화해와 기쁨의 순간이 끝나면 다시 고통이 찾아오는 인생의 순환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눈에 띄는 점은 신분제를 향한 비판이다. 극의 기본은 엄격한 신분 사회다. 페르디타와 보헤미아 왕자의 사랑이 험난한 이유는 신분 차이다. 페르디타가 공주로 밝혀지는 대목도 기쁨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사기꾼 방물장수가 왕자와 옷을 바꿔입자 갑자기 귀족으로 대접받는 장면은 극의 세계관을 비웃는 듯하다. 양치기 부자가 귀족으로 승격된 뒤 으스대는 모습은 신분제 전체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레온테스 왕은 손상규, 왕비는 우정원, 보헤미아 왕은 박완규, 충신 카밀로와 파울리나는 각각 이종무와 김수진, 아우톨리쿠스는 정현철이 연기한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배우들은 극의 맛을 극대화한다. 24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2만∼5만원. 1644-2003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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