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유니폼 넘버, 10번의 주인공…④걸음걸이나 자세모두 송곳같았던 타격천재 장효조
장효조(1954년 7월 6일 ~ 2011년 9월 7일)는 한국프로야구계에서 독특한 존재이다.
볼을 때려내는 재주, 이른바 컨택트 능력에서 한국야구사상 최고의 재주꾼으로 꼽힌다.
▲ 걸음걸이조차 꼬장꼬장, 약간 비딱했던 장효조
그를 잘아는 이들은 "세상과 타협치 않은 꼬장꼬장한 천재"라고 한다.
장효조의 걸음걸이는 독특하다. 마치 딸깍발이 선비(신을 신이 없어 비가오나 맑은 날이나 나막신만 신고 다니는 가난한 선비, 자존심만은 최고)의 뒷모습처럼 꼬장꼬장하고, 약간 비딱하게 걸어 다녔다.
삼성라이언즈 시절, 동네사람들은 장효조의 걸음걸이를 보고 "참 한성질 하게 걷는다"고 말했다.
나쁜 말이 아니라 늘 남과 다른 그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 그 성질 그대로라는 칭찬의 말이었다.
장효조는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대구로 이사했다.
대구삼덕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부 문을 두드린 장효조는 그때도 작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단번에 빼어난 제주로 감독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장효조는 대구상고(현 상원고)때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2학년때인 1973년 대구상고를 전국 3관왕(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에 올려 놓았으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타격왕에 뽑혔다.
1974년 대통령배와 봉황대기에서 타격1위를 차지하는 등 출전 4개 전국대회에서 타율 0.383을 기록했다.
장효조는 1975년 한양대학교에 진학한 뒤 국가대표팀로 뽑혔으며 1976년 백호기 대회에서 타율 7할1푼4리(14타수 10안타)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세웠다.
▲ 친정팀에서 은퇴하지 못한 아쉬움
장효조는 육군 경리단을 거쳐 1983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다.
입단 첫해 3할 6푼 9리로 타격 1위와 장타율 1위(.618), 출루율 1위(.475) 도루4위(22개) 등 이름 그대로 최고타자로 자리매김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3년 내리 수위타자에 올랐다. 한국프로야구 사상 타격왕 3연패는 지금까지 장효조외 없다.
장효조는 선수협 사태로 인해 1988년 12월 21일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됐다.
자존심 강한 장효조는 말없이 받아 들였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장효조는 1992시즌을 끝으로 꼬장꼬장한 걸음걸이로 야구장을 떠났다.
▲장훈이 되기 위해 10번을 고집했던 장효조, 그의 뜻대로 통산 타율 1위
장효조는 "나는 체구가 크지 않기에 일본에서 최고타자로 이름을 날린 장훈 선배처럼 되길 원했다. 그렇기에 10번을 달기 위해 달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의 희망처럼 장효조는 통산 타율 0.331(3050타수 1009안타)로 역대 1위자리를 지금까지 지켜내고 있다 .
▲ 꼬장꼬장했기에 지도자로 꽃피지 못하고 일찍 세상 등져
은퇴후 장효조는 롯데타격코치, 삼성 2군코치를 지냈지만 프런트들과 관계가 원만치 않았다.
꼬장꼬장한 성격에다 말재주가 없었기에 프런트들도 감독들도 그를 어려워했다.
'타자하면 장효조'라고 했지만 프로야구판을 떠나 지방대에서 선수들에게 볼을 쳐주면서 지내던 장효조는 2006년 삼성 스카우트로 다시금 프로야구계로 돌아 왔다.
삼성 2군 감독으로 있던 2011년 7월 프로야구 30년 레전드 올스타 생사 뒤 이상을 느껴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간암과 위암이 동시에 발견됐다.
너무 때 늦었다.
2011년 9월 7일 오전 7시 30분 58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같은 시대 그와 팀을 맞 바꿨던 전설의 투수 최동원도 선배 장효조가 세상을 떠난 1주일 뒤 사망, 프로야구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삼성은 2010년 양준혁이 은퇴할 때 그가 달았던 10번을 영구결번처리했다.
양준혁은 "10번은 장효조 선배의 것이다. 장효조 선배와 함께 영구결번 영광을 누리라는 뜻으로 안다"며 10번은 장효조의 것이라고 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